남편의 유학과 나홀로 롱디 육아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기 위해, 이제라도 꿈을 이뤄 보겠다.”
2015년 봄을 기다리던 2월 어느 날, 남편의 선언이 있고 우리 세 가족은 물론 친정 부모님까지도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남편과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며, 평안한 가정을 꾸리며, 그렇게 오손도손 자리잡고 살겠거니...했던 나의 단기 계획도 변경이 불가피했다. 남편은 일사천리로 모든 수속을 밟아 나갔고, 나와 가족들에게 본인의 뜻을 알리고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4월 7일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의 유학으로 아이를 서울에 데려오는 일정은 이제 미정인 상태가 되었다. 그가 언제 모든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지, 돌아와서 언제 재취업이 될 지 알 수 없던 날들이다. 엄마아빠는 아이는 신경쓰지 말고 회사 일 잘 하면 된다는 말로 나를 응원/위로해 주었다. 사위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딸의 모습이 마냥 좋지만은 않으셨을텐데, 행여나 부담을 느낄까 걱정하시던 시기였다. 나는 그렇게 평일은 서울 우리집에서 자취 생활을, 금요일 저녁 퇴근 후에는 친정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나 홀로 롱디 육아를 시작했다.
사실, 남편의 유학과 전업 선언에 가장 놀라시고 나를 걱정하셨던 건 친정 부모님이 아닌, 시부모님들이셨다.
전쟁 직후 부모님 세대 대부분이 그러했듯, 시골에서 태어나신 아버님은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부터 도시에서 유학하며 하숙하고 하숙집 아들을 과외하며 학교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이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가시고 안정된 직업을 얻으시고는 어머님과 결혼하셨고, 알뜰살뜰 살림하시는 어머님과 가정을 잘 꾸려오신 그 시절 부모님의 전형이셨다. 아버님은 일에서는 엄격하시지만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성품으로 직장에서 위아래로 인정과 존경을 받으시며 자수성가하셨다. (우연하게도 나와 친정 아버지의 지인 중 아버님과 같은 직장에 근무한 분들이 계셔서, 본의 아니게 결혼 전 생생한 레퍼런스체크가 되기도 했다;;;) 여하튼 남편과 연애를 하던 시절.. 아버님께서는 전부터 하고 싶으셨던 일을 실행하시기 위해 조금 일찍 은퇴하시고 도전을 하셨는데, 그 일은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두 분 모두 근검절약이 몸에 베어 있는 분들이셨는데, 도모했던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이로인해 평생을 모은 대부분의 자산을 잃으셨다. 두 분 모두 크게 상심하셨다. 그 사건이 있고 1~2년은 많이 힘든 시기를 버티셨다. 그리고 지치고 다친 마음을 추스리며 일어날 발판을 마련하실 즈음, 남편과 나는 결혼했다.
남편과 나는 몇 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고 만났던 터라.. 결혼식, 신혼집 마련 등등 제반 비용을 모두 온전히 둘이 감당했는데, 당시에 시부모님은 그런 상황들을 진심으로 미안해하셨다. 성인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적지않은 나이였기에 스스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게 나의 생각이었는데, 부모님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듯 했다. 그래도 둘이 자리를 잘 잡아 가고 손주도 태어나 정말 좋아하시던 ... 그런 상황에서 돌연 본인들의 아들이, 그것도 돈이 많이 들어갈 게 자명한 미국 유학과 전업을 선언한 상황에 나보다 더 당혹해 하셨다. 남편은 나와 우리 친정 부모님께 허가를 받고, 자신의 부모님께 말씀을 드린 듯 했다. 그렇게 아들의 유학 통보를 들으시고 아버님은 곧장 내게 연락하셨다. 그리고 내가 정말 동의한 것이 맞는 것인지 재차 확인하셨고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은데 힘들어서 어떻게 할 지... 미안함과 답답함을 표하시기도 했다. 어머님도 마찬가지셨다. 두 분 모두 조금이라도 유학 비용을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나 미안하셨던 것이다. 남편이 떠나기 전 날, 어머님은 유학비용에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보태면 좋겠다고 열심히 절약하며 모으셨을 쌈짓돈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당신의 아들이 원해서 떠나는 유학에, 비용까지 ... 나에게 힘든 짐이 지어졌음을 걱정하셨던 것이다. 그런 시부모님들께 당시에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곤, “저희 많이 대화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그리고 저 나름 잘 벌어요. 제가 댈 수 있어요.” 라며 너스레를 떠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가정의 실질적 가장이 되었다.
할 수 있다고, 잘 다녀오라고 , 남편에게도 우리 부모님께도 시댁에도 의연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많이 부담되고 무서웠다. 장학금이 없는 학교라 외부에서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고, 돌발이 없더라도 수 억의 교육비를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혼이었던 우리가 모아둔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나름대로 안정되고 연봉도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갑자기 단기간에 목돈을 마련할 수 없을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가득했다. 남편의 선언을 듣고 그 동안 들어 놓았던 적금들을 찾아 우선 급한대로 몇 천 만원을 만들었고 빚 지는걸 그렇게도 싫어했던 나인데..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니, 회사원이 돈을 모을 방법은 사실 하나 밖에 없었다. 재테크에 밝은 편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할 밖에.. 내가 아는 다른 수는 없었다.
남편은 미국에서 본인이 계획한 일정에 맞춰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 나갔고, 나는 주중에는 회사를 다니며 자취 생활을..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는 우리 아가를 보러 친정을 오가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없는 집이 허전했고 당분간 우리 세식구를 온전히 (경제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다행하게도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두려움을 떨쳐나갈 수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회사에서 하는 일이 재미있었고 나름 성장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또 같이 일했던 선후배, 동료들 모두가 너무나 좋고 실력있던 베스트 멤버들이었고 우리들은 팀웍도 좋았다. 선배들은 친동생처럼 나의 상황을 이해해 주고 응원해 주었다. 외벌이 선배들은 나에게 “우리는 이제 동지다. 네 덕에 외롭지 않다“ 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일상의 소소한 고충을 나누곤 했다. 남편도 이런 나의 부담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더 근검절약하며 생활비를 아끼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 해 겨울의 초입 무렵, 나는 출장으로 남편이 공부하던 지역 근처를 방문할 일이 생겼다. 남편은 열심히 차를 달려 나의 출장지까지 왔다. 남편이 떠난지 7개월여 만에 얼굴을 보았다. 호텔 문을 열고 앞에 성 남편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참 묘했다. 미국 미용실은 특히나 비싸다며 같이 사는 동생들과 서로 머리를 잘라줬다고 했는데, ‘꽃중년’이 꿈이라던 내 남자는 더벅머리가 되어 호텔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너무나 반갑고 마주 서 있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 짠했다. 그가 몇 푼 아껴보겠다고 집에서 동생들과 서로 머리를 자르는 모습이 그려져 웃기기도 했다. 진정 웃픈 상황이었다.
남편에게 “이 몰골로는 도저히 같이 못 다니겠으니 이리 오라”고 해서 한국에서 가져갔던 눈썹칼로 남편의 머리를 조금씩 다듬기 시작했다. 몇 개월만에 만난 와이프가 만나자마자 화장실에서 남편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다니... 둘 다 배꼽빠지게 웃었다. 출장이었지만 짬이 났던 그 이틀의 시간동안, 남편의 머리를 예쁘게 다듬고 우리는 모처럼의 데이트를 즐기고 남편의 지인들을 만나며 잠시 동안의 여유를 즐겼다.
출장 여정은 빨리도 흘렀다. 나는 귀국했고, 남편은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가 동생들과 서로 미용을 해주며 공부하는 생활로 돌아갔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공부 기간이었는데 처자식이 한국에 있던 그는, 그야말로 초스피드로 퀘스트를 달성해 나갔다. 그리고 미국에 간 지 11개월여만에 모든 공부를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공항 버스 하차장에서는 우리 아가가 나와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공항에서부터 아이가 자기를 낯설어 하면 어떻게 할 지 걱정하던 그였는데, 매일 영상통화를 하던 아빠가 눈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아이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말없이 그를 꼬옥 안아줬다. 남편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남편은 정말 모든 단계를 빠르게 밟아가며 초스피드로 전업을 준비했다. 그의 귀국으로 나도 이제 한시름 놓았다 생각을 했는데, 당시 한국의 취업 상황 상 만들어 놓아야 할 스펙이 하나 더 생겼고 그걸 준비하기 위해 또 한 번 수천만원의 목돈이 들어가야했다. 그 해 받았던 보너스를 모두 그의 교육비로 (눈물을 머금고) 이체시켰고 남편은 그 과정도 무사히 끝마쳤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금 취업전선에 뛰어든 그를 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지난 1년 여 동안 거쳐온 터널의 출구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 지원만 하면 어디든 바로 재취업에 성공하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첫 번째 지원은 낙방이었다. 낙방이란... 내가 쏟은 피, 땀, 눈물, 그리고 돈이 얼만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회사에 란 간 게 다행이지만...) 당시에는 그와 나 모두 꽤 큰 충격을 받았었다. 가족이 생이별을 하며 이렇게나 큰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며 준비한 일인데, 첫 지원에 낙방을 하니 얼떨떨했던 것이다. 며칠 간 충격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시 잘 해 보자 다짐하며 남편은 다른 회사에 지원을 시작했고, 나는 평일 퇴근 후에는 남편이 써 놓은 자소서를 첨삭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그의 재취업에 참여했다. 두 번째 회사 서류에 통과하고 이후 집에서 양복을 입고 모의 면접 시뮬레이션을 하는 등 대학 졸업 시절보다 더 열심히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전업 선언을 한 지 약 1년 반만에 그는 마침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회사에 최종 합격하며 성공적 전업이라는 목표를 이뤄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분한 자산을 갖지 못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활동이라는 무건운 숙제를 얻는다. 나와 남편도 각각 그 무게를 양분하며 우리 가정을 지탱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기둥 하나가 잠시동안 역할을 못하고 버텨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니 그 무게는 너무나 무겁고 힘겨웠다. 그래도 경제활동 외에 육아라는 너무나 크고 중요한 책임을 부모님이 해 주셨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아이도 키워야 하고 남편이 직업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면 나는 절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적 가장의 무게가 무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과 남편의 절약과 성실한 노력, 그리고 주변 동료들의 응원으로 버텨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