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러 간 지구 한바퀴
친정으로 거처를 옮긴 나와 아가는 (우리 삼남매와 언니네 조카 둘을 기르신) 부모님의 베테랑 육아 스킬과 노하우 덕분에, 서로에게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안락하게 잘 적응해 나갔다. 조금은 잠자리가 예민했던 우리 아가는 서너시간에 한 번씩 깼기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하는 상황이 조금은 버거웠지만, 내 아가의 풋풋한 아가냄새, 작디작은 손가락 발가락, 옹알거리는 입술, 점점 눈을 맞추고 옹알이 해주며 아침 저녁으로 쑥쑥 자라나는 아가를 보고 있노라면 ‘이래서 아이를 낳는구나’라는걸 절절히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새벽, 보채는 아이를 달래려 일어나 분유를 타러 나가는 비몽사몽 순간에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등과 도시의 불빛이 나와 아이를 위해 쏟아지는 별빛이고 축복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요즘의 나는 이런 감성을 다 잊고 지냈는데.. 그 때 당시 느꼈던 초보 엄마로서의 감성이 그득그득한 블로그 글을 우연히 찾아 읽어보니 그 시절 바이브가 절절하게 떠올랐다. 기록이란 이렇게나 중요하다. 혼자만 보려고 나름 써놨던 기억인데.. 새삼스레 읽어 보면서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어 몇몇 글들을 발췌해 본다.
[D+49] 요즘 제일 반가운 것 : 요 며칠 우리 아가가 변 보는 횟수와 묽음이 눈에 띄게 줄어 응가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요맘때 보편적인 특징이라고는 하는데.. 그래서 요즘 가장 반가운 건 우리 아가가 응가한 기저뤼를 보는 것! (omg...) 어제 처음으로 응가를 한 번도 못해서 마음 아팠는데, 오늘 아침 황금 응가를 보고 뽀뽀를 마구마구 해주었다. 육아를 해 보니 부모님께 정말 감사해야겠다는 마음이 새삼스럽게 들고, 아이가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기본적인 생리활동만 제대로 해 주어도 정말 고마운 일이라는걸 체감한다. 아가야! 지금처럼 건강하고 똘망하게 자라자꾸나.
[D+50] 벌써 50일 형님!! : 우리 아가가 태어난지 벌써 50일이다. 그 동안 어느새 커서 사람들과 눈을 맞춰주고, 이야기하려는지 입을 벙긋벙긋 옹알이를 하며, 제법 목도 가누게 되었고 손을 자꾸 입으로 가져가 빨아보려 한다. 모빌에도 제법 집중하며 잘 가지고 논다. 배꼽의 탯줄도 깨끗하게 잘 떨어졌고, 한 동안 나를 괴롭히던 태열과 좁쌀 여드름도 들어갔고 황달도 잘 이겨낸 우리 아가가 대견하다. 아이가 눈 맞추며 한 번이라도 웃어주면, 그렇게 행복하고 시큰시큰했던 팔목과 무릎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 입을 삐죽거리며 울상을 지을 때도, 응가하며 힘 줄 때 “앙!”이라며 앙칼지게 기합을 넣을 때도 너무너무 귀엽다. 앞으로도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자. 50일 동안 별 탈 없이 잘 자라줘서 너무나 고마워.
[D+51] 지금이 지나가면: 다시 회사에 복직해서 우리 아가를 매일 보지 못하는 그 날이 되면, 잠투정이 유독 심한 오늘도 그리워질 것이다. 용트림하며 잠 들기 힘들어 하는 지금의 모습도 그리워질 것이다. 눈마주치며 옹알옹알하고 웃어주는 모습은 더더욱 그리워질 것이다. 어제 초저녁 아이와 함께 잠이 들어버렸던 터라, 밤에 잠이 안와 꼬박 새우고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잔 탓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노라니, 문득 두어달 뒤 복직하고나서 느낄 그리움과 공허함, 그리고 미안함과 아쉬움이 눈에 선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지금 주어진 시간들에 감사하며 이 마음을 잊지 말고 즐겁게 즐겁게 보내도록 노력해 보자 다짐해 본다. 엄마 말대로 작은 일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담담히 잘 지내보자,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D+58] 혼자서도 잘해요: 우리 아가는 나름 자립심(?)이 강한 것 같다. 아가들은 안아주면 무조건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안겨있을 때 찡찡거려서 내려놓으면 혼자 자고 놀곤 한다. 아가나 어른이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걸까...싶다. 혼자 누워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빌이 신기한가 싶기도 하고, 두 손 모아 요리조리 관찰하면서 너무나 예쁜 소리로 재잘재잘 잘 떠든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소화시키는 덕분에, 나도 이따금 나가 강변 드라이브를 즐기다 들어오는 사치를 누리곤 하니 더 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D+62] 첫 가족 나들이: 오늘 부모님과 둘째조카, 그리고 우리 세 가족이 첫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다. 강촌리조트로 잠시동안의 외출이었지만 엄마의 진두지휘 하에 이렇게나 많은 준비물을 챙기고 있자니... 아가를 키우면 외출 준비 시간과 짐이 한 가득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가족들 다 같이 나가 바람도 쐬고 4월 선선한 봄바람을 쐬고 오니 더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D+70] 엄마/아빠라는 이름의 무게 : 아이가 태어나고 길러보니,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엄마’, ‘아빠’라는 호칭에 대한 무게를 느낀다. 나와 남편만을 믿고(?) 태어나게 된 이 아이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게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시간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에 대해 평생 고민하고 실행하는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자녀들 독립을 시키고 이제 좀 쉬실 시간에, 손주들을 돌보느라 50대를 다 보내고 계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행복하다고 이야기해주는 친정 부모님을 보며, 부모됨의 희생과 책임을 새삼 깨닫는다.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도, 아이에게 나의 욕망과 욕심을 투영하지 않고 소소한 즐거움과 기쁨, 보람의 시간을 채워 나가면 그것에 행복이겠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에게 내가 못 이룬 일들, 세속적인 성공을 강요하거나 무리해서 지어주지 말자 다짐해 보는 오늘이다.
[D+77] 요즘 우리아가는 사람들을 식별하는 듯 하다. 자고 일어나 눈을 맞추면 싱긋! 해주고, 온 몸을 마사지 해주고 나면 또 싱긋 미소! 나즈막히 이름을 부르며 미소 지어주면 싱긋싱글해 주는 그 미소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정말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말로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귀한 보물이다.
[D+80] 행복이 미안한 요즘: 아가와 함께 웃고 행복한 것이 미안한 요즘이다. 차디찬 바다에 갇혀 있었을 수 많은 아이들의 뉴스가 연일 나오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많이도 울었다. 부모가 되고 보니, 소중한 자녀들을 잃었을 부모들의 마음이 더더욱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아 먹먹하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세상에 제발 상식이 통하는 곳, 선의가 가득한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가는데 나도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D+86] 나날이 달라지는 우리아가: 아침 저녁 일어나는 시간이 제법 규칙적이다. 가족들을 보고 눈을 맞추면 방긋방긋 정말 잘 웃는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면 제법 옹알거리며 대화가 된다(으응?) 책을 읽어주거나 모빌을 틀어주면 버둥버둥거리며 좋아라 한다. 엎드려 놓으면 제법 고개를 높이 들 수도 있게 되었다. 유난히 콧대가 높은 우리 아가와 내가 주로 하는 애정표현인 ‘코찡’을 하면 살짝 윙크를 해준다. 방귀도 시시때떄로 자유자재로(?) 뀌는 듯 하다. 울음소리가 제법 형님스러워졌고, 울기 직전 입술을 삐죽이기라도 하면 너무나 예뻐서 모든 가족이 몰려 들어 구경을 한다.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럽다. 6월 복직을 결정했는데... 너무 일찍 잡은건가 싶어 후회스럽다. 평일 아가를 못 본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나 싫다.
[D+91] 엄마의 부재: 엄마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이렇게나 길게 부재한 건 처음이다. (세상에나...) 아가와 나는 오랜만에 서울 집에 올라왔다. 엄마가 여행을 가고나니 밀려오는 허전과 불안을 느낀다. 나는 얼마나 나약한 ‘엄마’이던가... 부모의 역할이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도 한다. 대학 이후에는 부모님께 경제적 의탁 없이 박사 공부까지도 알아서 잘 큰 독립적인 딸이라고 감히 자부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데 요즘 엄마아빠를 보면, 우리 삼남매를 낳아 정신없이 기르고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이제 좀 자유를 만끽하며 쉴까? 싶었을텐데 손주를 안고 부모님께 돌아와 봐 주시게 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온 사랑을 다 해 키워주시는 걸 보니, 내가 생각한 독립이 독립이 아니었다걸 새삼 느끼고 두 분께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아가야, 할머니 안 계시는 2주 동안, 조금 불편해도 엄마아빠랑 즐겁게 있어줘! ㅎㅎ
[D+109] Time Flies: 엄마가 이탈리아에 간 2주 동안, 결연한(?) 다짐을 하며 잘 지내자 했는데... 어머님께서 도와주시겠노라 자원(?)하며 우리집에 오셨다. 평소 몸이 약하신터라 결혼할 때부터 아이는 못 키운다고 선언하셨던 어머님이신데... 친손주가 나오고 나니 눈에 밟히셨던 것 같다. 마냥 좋긴 쉽지 않은 시어머님과의 시간이었지만, 혼자 반성도 많이 했고 감사함을 잊지 말자 생각해 본다. 어머님, 이모네와 외삼촌이 함께한 가운데 100일 잔치도 집에서 잘 끝냈고, 엄마의 귀국으로 우리는 다시 친정으로 왔다. 요즘 우리아가는 정말 더 없이 예쁘게 뽀송뽀송하게 잘 크고 있고, 눌렸있던 뒷통수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남편이 사 온 에디앤앨리스 매트 사용 이후 뒷짱구로 변신하고 있어 둘 다 너무나 잘 샀다고 뿌듯해 하는 중이다. 그리고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 다음주면 회사에 복귀한다. 이제 우리 아가를 주말에만 보아야 하는 것이다. 몸이 힘들긴 하지만 아가랑 함께 있는게 정말 행복하고 좋은데 큰 일이다. 남은 일주일,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잘 놀아주고 사랑을 듬뿍 주어야겠다. 시간아, 제발 천천히 가 줘.
[D+150] 보고픈 우리 아가: 회사에 복귀한 지 한 달여가 되어간다. 한 달 동안 8일만 우리 아가를 만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ㅠㅠ 회사에서 무얼 한다고 우리 아가 크는 것도 곁에서 못 보고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우리 아가에게 엄마는 어떤 일을 하고 있고 그 안에 나름의 보람과 재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엄마가 이렇게나 보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을까? 아니다.. 차라리 모르는게 나을 수 있다.‘ 등등 상사병에 걸린 사람마냥 혼자 쓸데 없는 생각에 잠겨 울적해 지곤 하는데, 그런 나를 아는지 엄마아빠는 종종 아가를 찍은 영상을 보내고 영상통화해주며 수시로 아이 얼굴을 보여주신다. 이제 마음 대로 뒹굴수도 있고, 사람도 잘 식별하는 듯 하고 코브라 자세도 엄청 잘하는 방실방실 잘 웃는 우리 아가, 많이많이 사랑한다!! 네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네가 하고 싶은 일들을 잘 지원해 줄 수 있도록 엄마아빠도 더더욱 노력하고 잘 할게.
[D+157] 혼자 앉은 우리 아가!!!!!! : 기특하고 또 기특하다.
[D+163] 자랑스러운 엄마가 될 수 있도록!!! : 아가야, 오늘은 더욱더 많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뽀보하고 싶단다. 우리 아가가 나중에 자라서 엄마아빠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주어진 상황과 일들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어. 엄마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네게도 자랑스러운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올곧은 일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그래서 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헛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우리 아가 정말정말 사랑해
그 시절 기록은 이 정도에 멈추었다. 이후에는 회사에서 TF 발령이 나서 매일매일 야근에 바쁘기도 했고 금요일 밤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생활이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고단했던 기억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를 낳고 부모님께 맡길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커서 두 세살 정도가 되면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을테니 그 정도의 기간 동안 의탁하는 것으로 이야기 했었다. 복직하고 1~2년 정도 참고 지내면 될 거라 생각했으니,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도 그 정도는 참고 커리어 공백 없이 이어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회사를 계속 다니기보다는 아이의 육아가 어느정도 안정되면 이직을 하거나 창업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옵션들을 놓고 고민도 하던 시기였다. 남편의 충격 선언(?), 요청(?)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 아가의 첫 번째 생일 직후, 남편은 갑자기 너무나 진지하게 내게 상의할 것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남편과 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압구정 현대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 겨울 평범했던 토요일 저녁, 나는 회사 행사가 있어 정장 차림으로 그 앞에 서 있었고 남편은 10분이나 나를 기다리고 하고는 뒤늦게 나타났다. 뿔테 안경에 붉은색 목폴라와 벨벳 쟈켓의 크지 않은 체구의 그... 늦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듯 통화를 끊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사뭇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늦어서 정말 미안하고 자신도 급하게 스키장에서 돌아와 채비하고 나온 길이라 미처 식당 예약을 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더더욱 미안하다고.. 연신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거듭하며 일단 어디든 가자며 허둥지둥대며 앞서 갔다. 내가 아는 식당에 가도 되었는데, 굳이 앞서 가던 그는 자그마한 일식 우동/주먹밥 가게 앞에 서더니, 간단하게 먹고 영동시장 근처로 옮기는게 어떨지 물어왔다. 나는 주말 근무에 지쳐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던 터라,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지자는 생각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은 주먹밥 집에서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시절 소개팅을 하는데 주먹밥 집은 정말 처음이었던 터라 어이도 없었고 당황한 기색이 가시지 않는 앞에 앉은 남자를 보고 있자니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식당에서 나오며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이야기를 꺼내는 찰나, 그는 굳이 본인이 단골인 이자카야가 있는데 꼭 같이 갔으면 좋겠다며 거듭 청했다. 영동시장은 우리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나는 자리를 옮겼다. 꽤 쌀쌀했던 그 날 저녁, 어묵탕과 따수운 정종으로 몸이 풀렸는지, 남편은 자신은 엄한 집안 분위기와 사회적 성공을 중요시한 환경에서 자라왔노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라는 동안 아버지가 본인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오신 적이 없어 서운했고 직업 특성 상 집을 비우시는 일도 많으셨다며 그렇게 가정보다는 하시는 일에 헌신하셨던 아버지는 주변의 존경을 받으시며 자수성가하셨지만, 본인은 그렇게 살기는 싫다고... 자신은 가족들 잘 챙기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고, 중년이 되어서도 곱게 나이들며 꽃중년으로 나이들어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 보며 이야기 했다.
”어떻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첫 눈에 반했어요.”
첫 인상이 호감이 아니었던터에 소개팅 첫 날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도 처음이었던 터라 매우 당황스러웠던 기억이다. 그러나 소개팅에서 서로 재고 떠보는 것이 일상이던 그 시절,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직진하는 그가 새롭기도 했다. 나는 학부 대학원 모두 공대였던터라... 문과생 지인이 없었는데, 국제통상을 전공했다는 이 남자를 보며 문과생은 원래 다들 이런가 싶은 성급한 일반화의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렇게 당황해하며 귀가를 했고, 다음날 그는 그 다음 주말에 얼굴을 볼 수 있냐는 연락을 해 왔다. 그리고, 상대가 정말 이상하지 않으면 한 번은 더 만나보라는 주변의 성화에 그 다음 주말에 그와 한 번 더 만났고, 그 이후 몇 번의 만남 끝에 함께 남산길을 걸었던 어느 날 그와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 교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본인 아버지가 나를 너무나 궁금해 한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하는게 순서 같으니 먼저 인사를 드리겠다고;;; 이 의식(?)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 가족 회의를 열었고 우리 부모님도 누군지 얼굴이나 보자하시며 마침 그 즈음 있었던 가족 행사에서 그를 만나셨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뵈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의 말과는 달리, 너무나 자상하시고 살뜰하게 대해 주셔서 당황스러웠다. 남편은, 아버님이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지 직장에서는 엄하기로 소문나신 분이라고... 자신도 저렇게 하시는 모습을 처음 본다며 신기하다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3년 여에 걸쳐 연애를 했고 초 겨울 결혼을 했다. 그는 첫 만남에서 나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즐겁게 즐겁게 싱글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청년이었고 자신의 꿈은 “곱게 늙는 꽃중년”이라며 눈웃음 짓는 장난꾸러기였다. 그의 회사는 안정된 BM의 대기업이었는데, 그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회사 안에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야겠다는 야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이나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는 못하겠다고 회사에 대해 늘 불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고 신혼 때까지 회사에서 사장 표창을 두 번이나 받아왔던터라... ‘말만 이렇게 하지, 나름 잘 하고 있나 보다’ 싶었던 그 시절이었다.
여하튼...
우리 부부에겐 나름 특별했던 만남의 순간과 결혼 후 아이를 얻고난 지 딱 1년이 지난 그 날, 우리 아가의 돌잔치를 막 끝냈던 그 다음날, 그저 안정된 직장에서 자리 잘 잡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자리를 잡으며 우리 아가도 얼른 키워서 데려오고 같이 살 수 있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그 날, 그저 즐겁게 꽃중년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던 남편은 정말 생경스럽게 전에 본 적 없는 진지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이야기했다.
“우리 아가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한국에서 준비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최소 3년은 걸릴 것 같아. 미국에 가서 준비하고 오게 되면 비용은 비슷한데 시간을 당길 수 있어. 나만 잘 하면 아마 1년 안에도 가능할 것 같아. 나 지금이라도 도전해 보고 싶어. 그렇게 해도 될까?“
연애 시절에도 진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 들었던 직업이고 그 때 다녀오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는데 남편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었다. 왜 그 때 하지 않은 거냐고 지금 이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되 물으니, 그 때 가면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였다며 그가 이야기하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퍽 난감했었다. 그는 찾아본 학교의 자료들과 예상 학비 등을 정리한 문서를 내게 건네 주었고, 생각보다 큰 학비에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 막막함이 몰려왔다. 만약 내가 승낙한다면, 나는 한 동안 남편 유학의 뒷바라지를 해야하는 상황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아가는 언제 어떻게 데려올 수 있을지 제일 먼저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 남자의 꿈을 접게 만드는 일이 되는 상황이라 선택지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의 유학은 친정 부모님께서 아이를 봐주는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우리 부모님들께서 허락을 하신다면 그 다음 스텝을 고려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또다시 열린 가족회의. 내가 더 당황했던 건 우리 부모님의 쿨함이었다. 아빠도 40대 초반에 동료들과 회사를 만들고 새로운 도전을 하셨던 경험이 있던 터라, 당황하지도 않으시고 너무나 쿨하게 “자네가 하고 싶은게 있다면 해 봐야지. 가서 잘 배워서 돌아와. 아이는 우리가 잘 돌볼테니 걱정말고,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더 볼 수 있으면 우리야 좋지“ 라며... 꿈을 쫓는 사위를 더 응원해 주는 멋짐과 쏘쏘 쿨함을 보여주셔서 참 많이 감사하기도 하고, 한 켠에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부모님의 허락, 그리고 걱정과 우려가 가득한 나의 승낙을 받자 그는 일사천리로 수속을 밟아 나갔다. 생각보다 모든 것을 미리 아주 치밀하게 알아놓았던 그는, 전광석화처럼 학교에서 admission과 비자를 받았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프로세스를 완료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나와 우리아가는 인천공항에서 남편을 배웅하며 잘 다녀오라 인사했다. 지금 생각해도 거짓말같던 두어달이었다. 그저 남들같이... 평범한 맞벌이 부부로 1년 정도만 버티면 우리 아가를 데려와서 세 가족이 오손도손 사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는데, 언제가 될 지 모를 남편의 유학과 재취업이라는 큰 산이 우리 가족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버텨야 할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나에게 남았다.
당초 예상했던 아가와의 재결합(?)은 그렇게 나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멀어져 갔고.. 본의 아니게 나는 주중에는 자취생활을,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우리 아가를 만나러 홀로 친정에 다녀오는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는 영상통화로 만나는 아빠 얼굴을 보며 쑥쑥 자랐고 부모님은 아빠랑 자주 보지 못하는 아이가 측은했는지 더 큰 사랑으로 길러 주셨다. 그리고 남편은 ‘얼른 다녀오겠노라’는 약속을 지키며 약 1년 여만에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길 공항에서 남편을 데리고 집에 오면서, 아이가 아빠를 몰라보면 어떻게 하나 둘 다 조금은 걱정을 했더랬다. 공항버스 하차장에서 할머니와 아빠를 마중나왔던 갓 세살이 된 우리 아가는, 어색해 하지도 않고 영상통화에서 만났던 아빠를 기억하는 듯 꼭 안아주어 남편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귀국 후에도 남편은 국내에서 전환이 필요한 각종 프로세스들을 처리하고 새롭게 취득해야 하는 자격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고 전업을 선언한지 약 1년 반 정도 뒤 재취업에 성공했다. 재취업 후에도 OJD 등 신경 쓸 일들이 산적해 있던터라, 바로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우리 아가는 할머니할아버지 집에서 어린이집을 잘 다녔고, 주말마다 만나러 가는 엄마아빠를 보면 세상 누구보다 반겨주며 다시 없을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고 일요일 밤 헤어질 때면 “왜 슬프면 눈물이 나는 거에요?“라는 주옥같은 말들을 쏟아내며 우리의 마음을 절절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가 6살이 된 그 해, 비로소 우리 세식구는 함께 사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친정에 갔을 때부터 우리 집에 데려오기까지 매 주 운전해 주행한 거리를 계산해 보니 약 4.8만 km 가량 되었다. 지구 한 바퀴가 4만 km라고 하니 5년 여 기간 동안 우리 아가를 만나려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본 셈이다. 부모님께는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엄마아빠와 평일에 떨어져 있어도 할머니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티 없이 밝고 환하게 잘 성장한 우리 아가에게 내가 더 큰 사랑을 받은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아이는 가끔 할머니 집에서 지낸 그 시절을 기억하며 어떤 일들이 있었노라 재잘거리며 이야기한다. 부모님도 가장 오랜 기간을 길러주신 우리 아가에게 지금도 더 없이 큰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신다. 남편도 Risk를 걸었던 그 도전으로 지금은 본인이 하고 싶었던 업을 직업으로 삼고 있고 아이도 그런 아빠의 일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디즈니 만화처럼 모든 것이 행복한 것처럼 글을 썼지만...
사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시절 그 시간이 정말 힘들었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런 압박과 무게, 스트레스와 피로를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고,.. 정말 최악은 혼자 아이를 키우고 혼자 남편을 Support하는 것일 수 있었다고... 그리고 아이가 어린 시기에 맞벌이 부부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주변 동료들을 보면서도 간접 체험을 했던 터라... 만약 내 욕심처럼 빨리 아이를 데려와 여느 맞벌이 가정처럼 남편과 전쟁같은 육아를 했다면, (나의 성향 상) 그 당시 느꼈던 아이에 대한 온전한 애정과 절절한 그리움이 같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편과 둘이 잘 해 낼 수 있었을까? 온전히 아이를 사랑하는데 온 정성을 다 쏟을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할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결국 그 시절, 아이와의 시간에 대한 갈급과 결핍이 있었기에 육아의 소중함이 배가 되었다는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 갈급과 결핍이 나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더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만들고 잘 해주기 위해 ’함께 하는 시간의 질‘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만들어 준 거라고... 2010년대 중반, 지구 한 바퀴 거리만큼을 오가며 우리 아가를 만나러 다녀온 그 시간 동안,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우리 아가에 대한 애정이 내 안에 더욱 더 소중하게 축적되었음을 이제서야 새삼스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