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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탄생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 두려움과 설렘, 반가움

by otium

“이게 무슨 느낌이지..?“ 오랜만에 강남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다타임을 한참 갖고 있는데 갑자기 몸에 오한이 느껴지며 무언가 몸에 변화가 생기고 있음이 느껴졌다. 후각을 제외하고, 평상시 나는 예민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 나인데.. 수다타임 중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약간의 오한과 함께 기존에 느껴보지 못했던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주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 우리집 현관 문 밖에서 나던 천둥소리처럼 크고 무서웠던 호랑이 울음소리

- 같이 있던 엄마가 “문을 열어야겠다”고 할 때 만류했는데 엄마가 문을 열었고

- 윤기나고 하얀 털에 검정 무늬가 있던 아기 호랑이가 우리집에 사뿐히 들어왔고

- 무서운 울음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너무나 예쁜 모습에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 자기집인양 우리집 거실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내 앞에 앉아서 아이컨택을 하고 스르륵 다가와 핥아주고 내가 쓰다듬어 주던 그 꿈!!!



친구들에게 당시 느낀 몸의 변화와 꿈 이야기를 농담처럼 전하고는, ‘혹시 그 꿈이 태몽이었나?’라는 생각으로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께 “축하드려요. 임신 6주입니다.“ 라는 진료 결과와 들었다. 선생님은 초음파 기계를 연결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와 화면에 보이는 강낭콩 같은 무언가.. 선생님은 그 작은 콩이 '아가'라고 알려주셨고 심장 소리를 들려 주셨다.

일정한 박자로 진료실을 한가득 채우던 우리 아가의 심장소리


두둥~두둥~두둥~

병원에서 그런 황홀하고 설레는 진료를 받은적이 있었던가?!!!

혹시 몰라 병원에 함께 갔던 남편은 옆에 멀뚱하니 서 있다가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와 나에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아가가 생겼다는 걸 실감나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둘이서 손 붙잡고 병원에 가며 어쩌면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을 수 있겠다는 상상과 이야기를 하며 갔지만, 막상 시각과 청각으로 진료실 가득 메워지는 아이의 존재감은 더 없이 크게 느껴졌다. 비현실적인 소리와 설레임, 기쁨, 신기함이 가득한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우리 둘은 상기된 얼굴로 여러가지 설명을 듣고 다음 진료일을 예약하고 산모 수첩을 받아들고 나오며 부모가 되었음을 (이제 부모가 되어야함을) 조금은 실감했다.




나의 임신 사실에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회사 동료에게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다. 특히 그 주 주말 만났던 친구들은 ‘세상 둔감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아이의 임신 사실을 이렇게나 빨리 인지했다는 사실을 꽤나 신기해 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아가의 태명 짓기에 돌입하며 엄마아빠 되는 준비를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이었지만, 임신기 단축근무 같은 제도는 없어서 생활 자체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팀 내 막내라인이었던 내게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에 선배들은 정말 많은 배려를 해주었고, 식당에 가면 문도 무겁다고 열지 못하게 하고 간식을 더 자주 시켜먹으며 메뉴 선택권을 전적으로 내게 있었다. 더불어, 오후에 여유가 생기면, 임산부를 운동시킨다는 명분 하에 당시 사무실 근처였던 남산 산책로에 다 같이 산책을 나갔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생활 속 임산부를 위한 작고 소중한 배려들을 듬뿍듬뿍 받으며 우리 아가는 무럭무럭 나라났다. 그렇게 출산 시기가 임박해 오고 있었다.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몸도 많이 힘들지 않은 복받은 체질이었던 나는, 출산 예정일 1주일 전까지 출근했다. 지금 되돌아 보면 뭘 그렇게까지 오래 나갔나 싶기도 한데, 당시의 일도 재미있었고 하던 업무의 성과는 어느 정도 만들어 놓고 싶은 욕심이 있던 때였다. 출퇴근을 남편이 시켜주었고 동료 선후배 모두들 아껴주던 시절이니 그저 회사가 나들이 장소 같이 느껴지던 복 받은 시절이었다.

물론 힘든 일들도 있고 들어가기 싫었던 미팅도 많았고 야근도 잦던 시절이라.. 만삭의 몸으로 늦게까지 일하는 상황도 많았는데, (벌써 10년이 넘은 기억이니 미화되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감성처럼 조금 거칠어도 곳곳에 낭만과 정이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임신을 하고 늘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도대체 다들, 아이가 나오는 걸 어떻게 알고 낳으러 가는 것인가?'


처음 해 보는 '분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선배/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경험담을 많이도 들려 주었지만, 사실 '내가 언제 우리 아가를 낳으러 가면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지막 달에 접어 들면서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놓쳐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괜한 불안이 생기기도 했었다. 일단은 유경험자들의 조언처럼, 겪을 때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그저 언제라도 병원에 갈 수 있게 준비물을 챙겨놓고 준비할 뿐이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밤이든 낮이든 내가 연락하면 언제든 달려와야 한다고 계속 주지시켰다.


우리 아이가 세상에 나올 예정일은 원래 2월 9일이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아이가 나오겠노라 나에게 신호를 보낼 타이밍을 기다리는데 우리 아가는 영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첫 아이는 원래 예정일보다 조금 늦게 나올 수 있다고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안나오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점점 커져갔다.

아이가 나오려면 엄마가 많이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말에 산책도 많이 했었는데, 출산 당일에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당시 7살, 4살이었던 조카 둘을 데리고 언니와 롯데월드에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삭의 몸에 출산일이 될 수도 있었던 그 날, 아이 둘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간다는 발상 자체가 참 황당하기도 한데... 즐겁게 몸을 많이 움직이는게 우리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다녀온 해맑은 임산부였다. 한 두시간 놀다 온 게 아니라 거의 8시간을 아주 찐하게 즐기다 왔다. 지금 생각해도, 내 체력이 보통은 아닌 듯 하다. 그리고 그렇게나 한참을 놀고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 그 날 저녁까지 우리 아가는 나에게 아무런 신호를 보내주지 않았다.




밤 10시 언저리, 오랜 시간 힘들었던 나는 좀 일찍 잘 준비를 하던 중 배 아랫 부분에서부터 묵지근하게 무언가가 누르는 듯한 압력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 그리고 이내 없어진 그 느낌. 순간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아이가 나오려는 그 느낌이 이건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났는데 이내 사라진 통증에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소파에 나와 앉았다. 그리고 몇 십분쯤 지났을까? 또 느껴지는 똑같은 묵지근한 느낌. 몸 안에 커다란 공이 내 아래 쪽을 누르고 가는 듯한... 희한하고 생경스러운 압력과 통증을 느끼며 다른 방에 있던 남편을 불러왔다. "오빠! 진통 시간 체크하게 펜이랑 종이 좀 줘봐, 우리 아가 이제 나오는 것 같아."


잔뜩 긴장한 기색의 남편이 포스트잇과 펜을 가져 왔고, 나는 첫 통증부터 이후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시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병원에 너무 일찍 와도 대기만 하고 고생한다는 가이드를 주셨던 터라, 통증 주기를 기록하며 선생님이 이야기했던 7분 정도의 주기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1시간 정도 되었던 압력과 통증이 점점 짧아짐을 확인하며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오빠, 가자!!"

[ 진통 주기를 적었던 메모 ]





한 겨울 새벽, 남편과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 느꼈던 차가웠던 겨울 공기, 새벽 한산했던 거리의 풍경, 앙상한 겨울 가로수 사이로 쏟아지던 가로등 불빛, 그리고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까지.. 이 차를 타고 가는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는 이제 두 자리가 아니라 세 명의 자리가 채워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분만에 대한 두려움은 이내 설레임으로 바뀌었다. 차 안에서도 진통은 느껴졌고 병원이 집 가까이에 위치해 이러저러 갬성을 느낄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상황을 설명하고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출산 소식을 듣고 급히 출근한 주치의 선생님도 초기 진단 후 “잘 참고 왔어요. 벌써 6cm 정도 열렸으니 바로 분만실 들어가실 준비 할게요."하고 차분히 안내해 주었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병원 환자복과 (다시 생각해도) 정말정말 싫었던 사전의 세세한 프로세스들. �

현대 의학의 도움없이 출산의 진통을 온전히 견딜 자신이 없었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무통주사'를 적시에 맞을 수 있다는 안내를 받고나니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무통주사의 약기운이 돌기 전까지 느꼈던 극심한 진통의 고통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수준의 통증이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며 우리 삼남매를 낳아 길렀던 엄마가 참 많이 생각나고 존경스러웠다.

이윽고 너무도 간절히 기다렸던 ’무통주사‘의 약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아침 7시 30분 정도가 되자 본격적인 분만 준비에 돌입했다. 분만실에 함께 들어간 남편은 조금은 겁을 먹은 듯 선생님 안내에 맞춰 뒷 쪽에서 대기했고, 주치의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외침에 맞춰 나도 함께 힘을 주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는 몇 번 힘을 주면 끝나는 상황들이었는데... 분명히 무통주사를 맞았는데도 극심한 압력에 눈물 따위는 나지도 않을 정도의 힘듦과 압력이 느껴졌고 간호사 선생님은 내 배 위로 올라와 위에서부터 배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전쟁터 같았던 분만실에서 주치의 선생님 구령에 맞춰 힘을 주고 호흡을 하기를 반복하며, '눈 앞이 캄캄해지며 별이 보이는' 분만의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정말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말이 나올만한 무렵... 내 배 안 쪽이 허전해짐이 느껴지는 동시에 우리 아가의 첫 목소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초음파 속 강낭콩의 모습으로 들려주던 심장소리가 아닌, 내 눈앞에 있는 실제 아가가 내는 내 눈 앞에 있는 우리 아가의 우렁찬 울음 소리였는데, 극심했던 통증 끝 찾아온 평온 때문에 더 극대화된 것일까?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나 궁금하고 너무나 만져보고 싶던, 수 개월을 기다린 우리 아가였다.




8시 15분, 53cm의 3.2kg의 건강한 모습으로 그렇게 우리 부부에게 와 준 아기를 만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남편은 어쩔 줄 모르는 엉거주춤한 포즈로 간호사 선생님의 가이드에 맞춰 아이를 안고 조금 훌쩍이고 아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포즈가 너무나 불안정해 보여 선생님이 곧장 아이를 데려가긴 했지만 � 분만의 북새통 같던 현장 한 가운데서 관찰자로 내내 과정을 지켜보며 아이를 처음 만난 나의 남편은 오묘한 표정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분만 후 처치가 마무리되고, 주치의 선생님께서 초음파에서 본 것처럼 잘~ 생긴 아이가 참 건강하게 나왔다고 알려주시며 내 가슴 위에 아가를 안을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그 순간, 아이의 울음 소리에서 느꼈던 비현실성은 모두 사라지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현실로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언제끝날지 모르고 나를 괴롭게 했던 극심한 고통과 분만의 통증은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도 너무나 감사했다.


드디어 우리 아가를 만났다.


회복실로 옮기고 깨끗하게 씻겨진 아가를 다시 만나며, 조금은 당황했더랬다. 처음부터 우윳 빛깔의 뽀얀 아가를 기대했는데 너무 쪼글쪼글하고 빨갛게 불어있는 얼굴이 낯설어서였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서 나도 아이도 건강하다는 걸 확인한 순간 든 생각이 ‘헉! 계속 못 생기면 어쩌지?‘ 라는 철 없는 그것이었다. 남편에게 아주 조금의 걱정을 담아 말하는데, 일찍 도착해 있던 엄마가 갓태어난 아가들은 원래 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서 다 같이 웃었다. 그렇게 아가를 안으며 남편과 함께 우리 아가에게 다짐했다.


엄마 아빠에게 와 줘서 고마워,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하게 와 줘서 더더욱 고마워.
아가야! 우리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 나가자

그렇게 우리 아가와 함께하는 우리 세 가족, 그리고 워킹맘으로서 나의 Day 1 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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