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동료들이 더 없이 좋았던 30대
나의 (본격적인) 사회 생활은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학부 졸업 후 잠시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대학원에 들어간 나는, 석사를 마치고 박사에 진학해 학위 과정을 이어가던 중이었는데.. 공부가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가정에 가정을 더하는 이론과 논문들을 끊임없이 이해하고 발제하고 어떻게 나만의 관점을 세워나갈 지 고민하던 그 시절, 문득 ‘내가 배우는게 진짜 세상일까? 이렇게 더 공부해서 공공 연구소에 가거나, 나중에 포닥을 하고 운이 좋아 교수로 학교에 남게되면 과연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같이 연구실과 기숙사를 오가던 일상은 보람도 있었지만 가설에 기반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겪어 보고 싶었다. 박사 1년차 2학기에 ’합격하면 회사에 가보고 아니면 딴 생각 말고 박사과정 잘 마쳐보자‘라는 생각으로, 만약 회사에 간다면 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회사 딱 한 곳에 원서를 냈다. 그리고 서류전형과 각종 면접들을 모두 마친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연구실에서 논문 발제를 준비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OO회사에서 입사를 축하한다고 선물이 왔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제 공부 안할거야??” 나에게 합격 연락이 먼저 오지 않고 무심코 적어냈던 부모님 댁으로 합격 선물이 갔던 것이다. 부모님은 무엇이 되었든 내 선택을 존중해 주셨기 때문에 학위를 중단하는데 대한 걱정은 하셨지만 뜻을 존중해 주셨다. 다만, 이 모든 일을 지도교수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진행했던 터라, 교수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생각이 많아졌다. 한 이틀 고민해 보다가 교수님께 상황을 공유드리고 현실을 한 번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전달드리니, 곰곰히 생각해보시다가 “일단 옵션이 있는게 나쁘진 않고 회사도 괜찮은 곳이니 1~2년만 갔다가 다시 와서 논문을 쓰자”라고 허락(?)해 주셨다. 어차피 교수님도 그 다음해는 안식년이셨던터라, 1년 정도 나가서 해 보고 다시 돌아오겠거니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20대 후반에 취업을 했다.
공대 학부와 대학원 시절 모두 밤 늦게 집에 오고 아침 8시까지는 연구실에 나가는 생활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회사의 출퇴근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연수원 생활이 끝나고 처음 배정 받은 팀은 열정이 가득 넘치는 베테랑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팀장님께서 이끌고 있는 신규사업 개발의 큰 규모의 팀이었다. 신규 사업이라는게 단어가 멋들어지게 느껴졌지만, 회사라는 울타리만 있을 뿐 그 안에서 스타트업처럼 피칭해서 예산을 받고 고객을 발굴하고 매출을 내며 내 사업을 꾸려 나가야 하는... 간판만 같이 쓸 뿐이지 사실상 회사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회사였다. 개발 빼고는 기획/운영/홍보/고객사 제안 등 각종 일을 해 보며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던 첫 3년이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사이, 대기업의 묘미(?)처럼 기존 팀은 여러 조직들을 거치며 목적이 변경되고 있었고 나는 전사TF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예전 팀장님보다 더 카리스마 넘치던 전무님이 직접 운영하는 TF에서 일 하면서 이전 신규사업팀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고객 관점에서의 니즈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구체화 해 나가는 본질은 같았지만 기업 고객이 아닌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고민하는 프로세스는 전혀 다른 일로 느껴졌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회사 안에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만의 견해를 가진 선후배들을 알 수 있게 된 점이 참 좋았던 시기였다. (남편이 유학을 결정했던 시기가 이 때였는데, 나는 회사 일이 새롭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을테니 미국에 가서 배우고 싶은 공부 하고 오라고 동의할 수 있었다.) TF 운영의 기간이 만료되었던 시기, TF장으로 같이 업무를 했던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정식으로 새로운 팀을 만들어 보려는데 같이 일했으면 한다고, 팀을 옮겨서 함께 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남편도 유학을 갔고 아이도 주말에만 볼 수 있어 평일은 온전히 일에 몰입하며 지낼 수 있던 시기였다. 연락을 준 선배는 실력은 물론 동료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분이셨고, 그 시기가 아니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쉽지 않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그렇게 팀을 이동한 나는, 서비스를 기획하고 전체 Product 개발을 책임지는 PM으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실력은 물론 책임감 높았던 동료들이 있었고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나름의 가치와 트렌드 변화에 앞서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동료들과 열정을 다 해 출시한 서비스는 시장에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그 도메인에서는 De facto 서비스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서비스 PM으로, 또 기획자로 커리어를 전환한 나는,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와 주말 롱디 육아로 고단하긴 했지만 회사 동료들과 일로 많은 위로와 보람을 느끼며 버틸 수 있었다. 1년에 한두번 연구팀 모임에서 뵈었던 교수님은 매번 ’이제 그만 돌아와서 학위를 하라‘고 이야기 주셨는데, 입사 초기에는 그래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차 시간이 가고 일이 재미있어지면서 ‘굳이 학위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도, 회사에서 다양한 하이포 과정에 참여하며 자리를 잡아가는 나를 보시고 일단 학위는 보류해 보되, 계속 회사에서 커리어를 가져갈 지 잘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주시는 입장으로 전환하셨다.
그렇게 나의 30대는 회사에서의 리즈 시절로 채워졌다. 나의 상사들은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믿을만한 실무 책임자로써 나에게 역할을 부여해 주셨고,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남편이 재취업을 성공하고 나서는 이제 내 앞에 장밋빛 미래가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열심히 일하긴 했지만 우리 아가를 서울에 데려오면 그 땐 육아휴직을 내고 가족과 온전히 시간을 좀 갖고 아이가 입학하는 것도 곁에서 지키리라 계획을 세웠다. 남편이 이제 안정적인 버팀목 역할을 해 줄테니 내가 아이를 온전히 케어하면서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엄마로서의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거라 예상했다. 이러한 이유로, 팀장 직책을 맡으라는 몇 차례 제안도 모두 거절했고, 여러 곳에서의 이직 제안들도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드디어, 이제 곧! 육아휴직을 개시하기 직전이었다.
학위 대신 취업을 하고 10여 년 동안 일했던 회사는, 나에게 퍽 고마운 곳이었다. 똑똑하고 재기발랄한 동기들과 배울 점이 참 많았던 선후배들, 그리고 재미있던 프로젝트들과 다양한 경험.. 거기에 나름의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으며 남편의 유학도 뒷바라지 할 수 있었던 버팀목이기도 했다. 20대가 많이도 불안정하고 무언가를 계속 성취하고 쌓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시기였다면, 30대의 나는 결혼/출산/육아/유학 서포트 등 중요한 생애 주기 변화와 가정을 꾸려가는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시기라고 느껴졌다. 물론 힘이 많이 들긴 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일도 가정도 안정되는 느낌에 평안함을 느꼈다. 특히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잘 자라는 모습에 더 없는 행복을 느끼고 매일 같이 있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안정과 평안이 깃든 생활이 지속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아이를 서울 우리집에 데려오기로 하고 육아휴직 개시를 눈 앞에 두고 있던 그 해 겨울, 그룹 인사를 담당한다는 사장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의 회사생활은 다른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