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있던 마음 돌봄의 시간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날이 온다. 조금만 더 힘 내. 견뎌’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에게 되뇌이던 말이다. 나는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고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을 거쳐 회사에 들어오기까지 그 흔한 휴학 한 번하지 않고 지내왔다. 잠시 쉬는 여유따위는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최선을 다 해 우리를 길러주셨고 정서적 안전망을 만들어 주셨다. 그렇지만, IMF를 거치면서 아빠가 다니던 회사도 매우 어려웠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도 체감할 정도로 우리 집 경제 상황은 어려웠다.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대학 입시를 치룬 나는,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학도 부모님께 부담을 최소화 하고자, 평소 목표하던 대학이 아니었지만 4년 장학금에 약간의 용돈까지 받을 수 있는 안정된 선택을 했다. 나를 둘러싼 경제적 여건과 환경이 힘들거나 불만이 있어도 내색해도 달라질게 없다고 생각해 속으로만 되뇌이며, 나 스스로 자립하려 애쓰던 시기였다. 대학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일은, 그저 내가 잘 견디고 해내야 하는 나만의 숙제였다. 이제 성인이니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도 이 점은 확실히 가르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교수님들은 미국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권하셨다. IMF 여파가 조금씩 걷히던 때이긴 했지만 유학을 가면 초반에는 목돈 마련이 필요했다. 그 때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나는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모험보다는 안정을 선택했다. (이때의 선택은 사실 내내 후회가 되긴 했지만..) 여하튼 빨리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택했고, 이렇게 살면 조금 더 안정의 기반을 빨리 마련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학교를 나와 자립해야 하는 서울살이... 아무런 기반이 없던 나에게 서울은 꽤나 팍팍한 곳이었다. 형편 상 목돈이 드는 보증금 마련은 어려웠고, 부모님 도움 없 내 처지에 구할 수 있던 첫 자취방은 역삼역 근처에 있던 고시원이었다. 그래도 안전한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비싸도 깨끗한 곳을 택했다. 월세가 50만원이나 했고 나의 첫 연봉이 3천 만원 정도였으니... 연간으로 치면 꽤나 많은 지출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 회사생활을 경험해 보니, 소비와 여가를 즐기는 것도 아닌데 기본적인 의식주만으로도 지출이 상당했다. 부모님이 참 많이도 힘드셨겠다고 절절히 와닿았다. 생각처럼 돈도 많이 모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부에서 배운 것의 한계가 느껴지고 이 회사를 계속 다니면 어떤 모습이 될까? 라는 생각에 자신도 없어졌다. 결정적으로 첫 회사에서 하는 일이 재미가 없었다. 다소간 경제활동을 미루더라도 조금 더 배워서 다시 사회에 나온다면 내가 생각하는 정서적 경제적 안정을 얻는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나름 치열하게 대학원에 가기 위한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전공을 바꿔 지원할 마음이었기에 주말에는 늘 도서관에 가서 대학원 입시와 수업을 미리 공부했다.
그렇게 1년 남짓 회사 생활을 경험하고 얼마간의 돈을 저축한 상태로 원하던 대학원에 진학했다. 목표하던 학교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부모님께서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두 분은 넉넉치 살림 탓에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 해주었다고 내내 마음을 쓰고 계셨는데, 대학원 합격 소식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내신 듯 했다. 취업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기뻐하시고 축하해 주셨다. 모처럼 효도를 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함이 가득했고 잘 한 선택이었다.
대학원에서는 연구비와 장학금으로 학비를 절약할 수 있었지만 과외를 하기에는 논문 연구와 세미나 준비 등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알바는 잠시 접기로 했다. 저축한 돈을 조금씩 쓸 수 밖에 없었지만 대학원 생활은 힘들어도 꽤나 재미있었다. 아침 일찍 연구실에 가서 밤 늦게 퇴근해 기숙사에서 잠만 자고 다시 나가는 쳇바퀴 생활의 반복이었지만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체감되고 논문 연구도 나름의 보람이 있었다. 그 시절 만난 똑똑한 친구들에게 정말 많은 자극을 받았다. 다만 석사를 받고 박사에 진학하면서는 나름의 여러가지 한계가 느껴졌다. 그리고 20대 후반에 접어들자 한 번 정도는 환경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취업을 결심했다. 일 해보고 싶던 딱 한 곳에 지원하고 안 되면 마음을 접고 박사 공부를 해 보리라 다짐하먀 시도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한 곳에 합격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학교를 떠나 사회에 나왔다.
회사에서 새로운 일과 환경, 사람들에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나는 또다시 성장하는 듯 했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 남편의 유학 등 주변의 변화에도 홀로 버티며 가정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마련했다는 것에 나름의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부모님께서 아이 육아를 맡아주셔서 가능했지만..)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던 어린 여자아이는, 비로소 전부터 꿈꿨던 나름의 든든한 울타리를 만든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남편이 돌아와 자리를 잡고 우리 가족이 비로소 안정과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삶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걸 다시금 깨달았다. 회사 이동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COVID-19을 거치며 나는 안팎으로 지쳐 버렸고, 옛날 그 시절의 불안정하고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버거워했던 어린 여자아이로 회귀해 버린 듯 했다.
지난 세월 동안 나름대로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쫓은 건 신기루였다는 생각에 허탈감과 우울감이 가득했다. 나는 무엇을 갈망한 것이었을까?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을 추구한 걸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학교와 회사를 다니며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일에 노동력을 쏟고 보상을 받는 것이, 내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 시스템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사는 사회 시스템은 내가 그렸던 이상대로 작동하는 곳이 맞는지? 나의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고 있었는지? 나는 내 인생을 의미있게 살고 있는지?‘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이 생겨났고 확신은 희미해졌다. ‘나만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신기루를 쫓고 있었던 같다는 허탈과 위기감도 들었다. 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가치와 중요한 일들을 다시금 짚어내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느꼈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도 돌봄이 필요했다. 나는 물론이고,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아이와 남편과의 관계를 보듬지 않으면 조금의 충격에도 큰 파동이 일어날 것처럼 우리 모두 예민해져 있었다.
휴직을 신청했다. 주변에서는 ‘조금만 더 버티면 곧 임원인데? 커리어를 펼쳐나갈 시점인데 그 동안 고생해서 쌓은걸 다 뒤로해도 되겠냐’는 만류가 돌아온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되뇌어 왔던 말들이 기시감처럼 떠올랐다. 사실 나를 아꼈던 선후배들이 준 조언이 맞을 수 있었다. 훨씬 더 큰 금전적 보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회사라는 사회 안에서 출세하고 더 큰 임금과 권한을 받기에 최적의 장소에 있었고 이를 레버리지할 수 있는 기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더 노력을 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큰 가치가 있지 않다고 느껴졌다. 내가 가진게 많지는 않았지만, 무용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저 하기 싫어졌다. 뙤약볕 아래 오랫동안 수분을 머금지 못해 생기를 잃어버린 풀처럼, 흐들흐들해진 상태였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의 평화와 관계의 안정을 갖는 게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였다.
휴직 첫 날, 아이를 등교시키고 동네 뒷 산에 올랐다. 그 곳에서 바쁜 도시의 일상이 내려다 보였다. 어제만 해도 출근하던 시각이었고 출근 행렬에 몸을 싣고 분주하게 하루를 계획하고 움직였던 내 모습이 보였다. 뒷 산 꼭대기에서 그런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노라니 나는 잠시 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구나...라는게 실감되었다. 그리고 허세를 부리듯 한 껏 여유를 잡으며 산에서 내려와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서 여유 있게 아침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하교하기까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지럽혀진 공간과 아침 먹은 것들을 치우고 있자니 곧 학교를 마칠 시간이라 부리나케 정문에 가서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는 누구보다 밝게 나를 불러주며 뛰어와 안아주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롭고 충만한 행복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임시 전업주부의 삶은 생각보다 많이 바빴다. 회사에 다닌다는 핑계로 내팽개쳤던 집안 곳곳의 정리와 가족의 먹거리를 챙기는 일들, 티는 안 나는데 매일 반복해야 하는 청소들은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학원 라이드와 입시 설명회, 학년이 높아지며 아이가 어려워하는 학습 진도를 집에서 지도해 주는 일까지.. 집안 일은 하면 되는 일들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하면 할수록 ‘해야 하는 일이 체증’하는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 교육에 진심인 엄마들을 비하하고 비아냥거리는 말들도 많지만, 급변하는 세상에서 아이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려면, 내가 자랄 때와는 다르게 부모가 보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얻고 알아보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걸 새삼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몇 개월이 쑥 흘렀다. 회사를 다닐 때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듯 했다. 아이는 집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분리 불안 증상은 많이 사라지고 불안도 가시는 듯 했고, 남편도 하는 일이 정상화되어 점차 여유와 안정을 찾아갔다. 이제 생각할 것은 나의 미래였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해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하는 불혹의 내가 남아 있었다. 우선, 직업 관점에서 계속 이렇게 회사를 다니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전에는 회사에서 나는 그냥 그런 회사원이 아니라 그래도 특화되어 있다는 나만의 Identity가 있었다. 자뻑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믿고 10여 년을 재미있게 다녔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에 보람을 느꼈는지?’ 모든 것이 희미해진 상황이었다.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직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건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회사라는 울타리에 메여 일을 하는 본질 자체는 동일하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지만 스타트업이 아닌 이상, 회사라는 시스템 자체가 동질적이기 때문에 지금 느낀 한계가 똑같이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꽤 서글픈 일이었지만 이제 회사라는 공간은 나에게 그저 돈 버는 곳으로 여겨졌다. 직책이 올라가면 달라질까? 커다란 회사 시스템에서 사원, 팀장, 임원, 최고위층까지.. 본의 아니게 여러 계층을 관찰한 나로서는, 그것도 아니겠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다시 찾아야 할 일이었다. 매일 같이 마음 속에서 폭풍이 일었지만, 이제라도 이런 생각이 든 게 다행이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다.
그 동안 해 보지 않은 다양한 경험을 하기로 했다. 나를 필요로 하고 키워야 하는 아이가 있으니 아예 환경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일들을 찾아 해 보기 시작했다. 내 손으로 생활에 필요한 음식과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며, 무엇을 해야 내가 가장 즐겁고 평화로움을 느끼는지 관찰해 갔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천천히 찾아나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전처럼 스스로를 채근하거나 몰아세우지 않았다. 어린 시절 혼자 상경해 안간힘을 쓰던 그 아이가 해 온 노력들이 모여서, 지금 이 순간 앞으로의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동안 감사함과 인정보다는 못마땅함과 후회, 불만이 가득한 지난날들이었는데... 이제서야 그 시절 열심히 해 온 스스로에게 애틋하고 고맙다는 정서를 갖게 되었다.
지금도 나의 Next에 대한 계획과 준비는 계속되고 있다. 실행에 옮길만큼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이런 모습이 되면 좋겠다는 이상향을 그려 보며 차근차근 준비할 사항을 조금씩 조사해 본다. 들판에 서서 어디로 갈 지 아직 선택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쓸데없는 자기 비판이나 회의감에 찌드는 감정은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보듬어주며 다음으로 나아갈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워본다. 그리고 나중의 실행을 위해서라도 경제적 기반은 더 다져야 하니 이를 위한 수단으로 회사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거창한 일은 아니더라도 내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실행해 보기까지는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 사이 아이를 잘 길러내고 교육시키는 중요하디 중요한 숙제를 잘 수행해야 하니 밝게, 그리고 꿋꿋하게 조금 더 버티며 준비하자 다짐해 본다. 그리고 잠시의 쉼을 통해 얻은 여유 덕분일까, 더 이상 예전 나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독기가 가득 차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들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는 않는다. 그 동안 많은 기회와 도전을 놓치거나 외면하며 살아온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는데,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그저, 앞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을 놓치지 않으면 되겠다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을 뿐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휴식을 취하며 나와 가족을 돌보는 여유를 가진게 다행이었다. 특히 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보낸건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동안 스스로를 다그치며 꾹꾹 참으며 노력하고 버텨온 내 안의 어린 여자 아이에게 이야기해준다.
“너무 무리해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가는데 에너지를 쏟자. 충분히 잘 해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