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에 시작된 질풍노도
드디어 우리 세 가족은 길고 길었던 각자살이를 끝내고 모여 살게 되었다. 아이는 고맙게도 별 탈 없이 서울에서의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해 주었고, 나와 남편도 아이와의 시간에 감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자리잡아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도 안정이 오는가 싶었다. 그 시절 남편과 나는 무엇이든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제 아이와 행복을 누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 입학과 함께 육아휴직을 시작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세 가족이 완전체로 살기 시작한 그 해, 나는 전체 계열사 직원 중 몇 명을 선발해 운영하는 그룹의 하이포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힘들었던 외벌이 가장의 시간을 그래도 잘 견딘 결과라 생각해 뿌듯함이 있었고 많이 바빴지만 현업과 교육 모두 열심히 참여했다. 1년 여에 걸친 교육은 마무리 되었고 그 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룹으로 적을 옮겨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통보?)이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해 봄직하다고 생각했을까 싶지만, 나는 이제 한 해만 더 일 하고 육아휴직을 하려 계획 중이었고 아이가 서울에 온 이상 여기서 더 바빠지고 싶지 않았다. 담당자에게 그 제안은 내게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고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며칠 뒤, 그룹 HR을 담당하는 사장님이 면담을 하자며 전화를 해왔다. 드라마에 나오는 세트장처럼 엄숙하고 근엄한 분위기가 감돌던 집무실, 사장님은 부드럽고 자상하게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고 그언 분위기로 면담을 이끌고자 했지만 내용은 사실상 이동하라는 지시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or 나의 부서에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는..) 하루 생각할 시간을 달라 요청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팀장님과 상황을 공유했다. 늘 나를 지지해주었던 그 선배는, ‘솔직히 본인 입장에서는 팀 운영을 생각하면 안 가는게 좋지만, 회사에서 많은 사람이 바라는 기회이니 만약 간다는 결정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지지하겠다’고 해 주었다. 어떻게 하는게 맞을까... 고민이 더 깊어졌던 하루였다. 휴직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고 한 해 동안 정말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일을 해 볼 기회를 얻을 것인지? 그대로 남아서 해 오던 일을 잘 마무리할 것인지?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면담에서 들은 으름장이 얼마나 진심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런 일이 있노라 이야기했다. 그는 어쩌면 새로운 기회일 수 있으니, 잡아보는게 어떻겠냐고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엄마는 도움이 필요할 때면 우리집을 오가며 아이를 봐주고 계셨고, 육아에 대한 부담도 본인과 장모님이 좀 더 시간을 내면 된다고... 많은 고민을 한 그 날 밤을 보내고, 나는 이동하겠노라고 사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나의 회사생활은 전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기업에서 내가 의도하고 원하는 업무를 맡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적어도 내가 듣고 경험한 바로는...) 그리고 마음에 드는 일이어도 의지와 관계 없이 일이 바뀌는 경우는 흔하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나는 서비스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아닌, 그룹의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이었다. 다 그렇지..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했지만 첫 출근은 정말, 매우, 너무나도, 진심으로 생경스러웠다. 만약 내가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높이높이(?) 올라가 임원/사장이 되겠다는 야망이 충만한 사람이었다면, 나의 이동은 더 없이 좋은 기회로 받아드렸을것이다. 그리고 조직 이동 후 실제로, 동기/선후배들로부터 ‘도대체 어떻게 그 조직에 간 것인지?’에 대한 문의를 꽤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저 순진하게 일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었다. 대학원 시절 경영대 수업을 들으며 접했던 ’전략’, 그리고 전략적 프레임웍 등등은 나와 정말 맞지 않는다고 여겼었는데, 정통으로 그 업무를 맡게 되어 버리니 이동하고 한두달 간은 멘붕이었다. 보기에도 숨막히는 보고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처음이었고 한국어였지만 전혀 다른 용어들에 외국어를 듣는 느낌이었고 말과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전보다 상대적으로 수직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사무실 분위기와 업무 프로세스, 인테리어까지도 모든 것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기존에 알고 지냈던 다른 계열사의 선배들 몇몇과 같이 이동해서 상대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있었다는 것. 그것 하나가 큰 믿을구석이었고, 어디서든 사람복은 있어 다행이라는 위안을 삼으며 조금씩 일을 배워나갔다. 출근 첫 날 딱 1년만 이곳에 머무르고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혼자만의 계획을 세웠다. 눈 딱 감고 조금만 버티면 될 일이었다. 그 때의 나는 늘 그렇듯 매우 순진하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나는 ‘정치’를 극도로 싫어한다. 본래 공동체/집단의 발전을 위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조율해 나가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나, 그 본연의 뜻이 무색하게 서로 다름을 비난하고 그 게임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들의 오롯한 이익과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자신이 원하는걸 취해 나가는 것. 그것이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우리나라의 정치이자, 회사 안에서의 ’사내정치‘였다. 대기업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과/퍼포먼스가 아닌 정치질을 통해 회사 경영과 승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우리회사도 그런 분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2010년대를 지나오면서 회사는, 객관적인 성과가 아닌 누군가의 끈과 ‘우리가 남이가’ 식의 소수의 네트워크에 의해 운영되고 승진이 이루어졌고 점점 더 심화되는 듯 했다. 구글의 조직 문화 연구 중 ‘조직 내 구성원들의 동기부여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의 승진’이라는 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 1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우리회사는 딱 그런 류의 인사가 횡행했다. 소수의 이너써클에 의한 의사결정과 근거를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승진, 그리고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는 각종 의사결정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문화... 그리고 점점 더 Demotivation되어 가는 현장의 팀장과 직원들 ... 대학원 시절 그래도 여기는 괜찮겠다는 판단으로 입사했던 우리 회사는, 아직까지 겉에서 보기 나쁘지 않았지만 속은 썩어가고 있었다. 연차가 점점 쌓이고 시야가 넓어질수록 이런 상황들이 더 체감이 되었고, 그 때문에 그저 조용히 현업에 머무르며 내 작은 텃밭을 가꾸고 싶어 이동을 거절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동을 택했던 배경에는, 내가 듣고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상황들이, 정말 진짜일까? 내가 보는 것은 사실인가? 어디까지가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고 조직/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일까? 라는 호기심도 한 켠에 있었던 것 같다. 매트릭스에서 Neo가 진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빨간약을 먹은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라는 것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실을 조금을 알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있었던 듯 흐고... 정말 순진하게도 높으신 분이 뱉어내는 으름장이 혹여나 내가 좋아하는 기존 팀과 선배, 동료들에게 화를 미치지는 않을까? 라는 걱정도 있었다. 이동을 결정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이동에 대한 선택과 책임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부서를 이동하고 경영진들을 볼 기회가 많이 있었다. 회사에서 어떤 식으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지,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고싶지 않아도 보이고 듣고싶지 않은 일들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어디든 이런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참 순진무구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회사는 ‘이윤의 창출’하는 곳이라는 걸 몰랐던게 아니지만, 그 이윤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 권력자의 앞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듯 했지만 돌아서서 다른 생각을 하고, 조직이 가진 힘은 모이지 못하고 모두 흩어졌다. 각자도생, 개인의 욕구와 영달을 추구하는 기류는 회사에서 위로 갈수록 더 짙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나보다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았던 남편은, ‘나의 지난 회사생활이 특이했을 뿐, 대부분 직장에서 그런 일들을 관찰하고 경험한다’며 조금만 더 버티고 복귀해보자며 축처진 나를 위로(?) 했다. 넓게 보면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조차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쫓는 시류가 만연해 있으니,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에서도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현타가 왔다. (내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곳에 간 나에 대해서도, 야망이 넘치고 줄을 잘 대어서 그 이너써클에 들어간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들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자아가 흔들리던 그 시절의 나는, 주변의 조그만 시선과 소문들에도 마음이 상하고 휘둘릴만큼 멘탈이 약해져 있었다.
그 사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COVID-19이 닥쳤다. 나와 우리 가족 앞에 긴 터널이 놓였다.
코로나가 시작된 직후, 1년만 이동한 조직에 있다가 육아휴직을 내고 원래 팀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던 나의 계획도 팬데믹으로 문이 닫혔다. 몇 명 되지 않는 인원으로 운영되던 조직에서, 나 혼자 육아휴직을 하고 빈자리를 만들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획했던 육아휴직을 쓰지 못했고,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엄마인 나는 옆에 많이 있어줄 수 없었지만 다행하게도 남편이 단기 휴직으로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었다. 그의 직장은 전염병으로 인한 셧다운에 Risk가 높은 사업 구조였는데, 코로나가 시작되고 초반에는 괜찮은 듯 했다. 회사는 직원들을 로테이션하며 단기적으로 휴가를 주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그 덕분에 그는 육아휴직이 아니어도 아이의 등하교, 그리고 하교 후를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로인해 그의 수입이 줄어 가계 경제에 영향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를 돌보는데 공백이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팬데믹 상황에서 그의 회사는 점차 어려워졌고, 조금이라도 나오던 월급은 곧 무급으로 바뀌었다. 나는 또 외벌이 가장이 되었다.
휴직 초반 남편은 나 대신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했었다. 그러나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또 못하게 되는 상황이 닥쳤고, 가장으로써 경제적 기능을 다 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과 급격한 화폐 가치의 하락으로 나 못지 않게 멘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와 나 모두 급격한 불안과 초조, 스트레스를 겪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이는 가정에서의 불화로 이어졌다. 나는 나대로 회사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집에서 해소할 수 있는 공감과 따뜻함을 원했고, 그는 그 나름대로 약해진 자존감에 존중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서로를 위해줄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 시기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자 생각하지 않고, 좀 더 해 주기를 바라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의 다툼은 늘어갔다. 그리고 서울에 와 엄마아빠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것을 기대했던 아이는, 그런 엄마아빠 사이에서 상처 받고 있었다. 2학년이 되던 해, 아이는 나에 대한 분리 불안 증상이 늘어갔고 회사에 있으면 몇 십분에 한 번 꼴로 전화가 오기 일쑤였다. 이런 아이의 모습에 나는 남편을, 남편은 나를 탓하기 바빴다. 몇 개월 그런 상황을 겪고,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상담을 받았다. 나는 속으로 ‘아빠가 주양육자인 상황이니.. 그가 아이에게 충분히 안정을 주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생각했고, 선생님도 그렇게 이야기해줄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처음으로 꺼낸 한 마디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엄마의 빈자리가 큰 것 같네요...” 유아기 시절 주말마다 본 상황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초등 저학년은 아이가 겉으로는 큰 것처럼 보여도 엄마를 항상 갈구하는 시기라고.. 그런 상황에 엄마가 부재한 걸 아이가 많이 불안하게 여겼을 거라고...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는건 알지만,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해 주고 그런 퀄리티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주라고... 그게 선생님의 진단이자 처방이었다.
머리가 띵했다. 나는 왜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 회사에서도 엉망이 된 나는, 집에서도 엉망인 엄마가 된 듯 했다. 끝날 기미가 없었던 팬데믹처럼, 나 혼자 캄캄한 어둠에 떨어진 듯 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내는게 없는 사람이었구나... 싶어, 아이를 재우고 난 뒤에는 속절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상담이 지나고 몇 일이 지났을 까, 그렇게 울적하던 내 자신을 돌아보니 억울해졌다. 이렇게 현실에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시급한 건 나 스스로의 마음부터 챙기는 일이었다. 아침 출근 길마다 5분 명상을 틀어놓고 온전히 스스로 잘 했다고 다독여주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 행위가 엄청나게 큰 전환점이 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출근 길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리고 회사 상사/동료들에게도 우리 아이의 상황을 공유했다. 어쩔 수 없지만 만약 야근이 길어지게 되면, 나는 재택으로 전환해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정말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식이나 골프 약속 등도 모두 없앴다. 팬데믹 시절, 상사들은 골프 약속을 잡고 업무 이야기를 하는걸 즐겼는데 피치못할 상황이 아니면 나는 이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요구해도 되는가? 내가 이런 요구를 하게 되면 워킹맘들에 대한 편견이 씌워져 열심히 하는 다른 동료들에게 폐가 되진 않을까?‘ 라는 주제넘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그저 내게 필요한 배려들을 주변에 알렸고, 다행하게도 상사와 동료들은 이런 나의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남는 시간은 오롯이 아이와 보냈고, 자존감이 많이 무너져있었던 남편에게도 먼저 여유를 갖고 따뜻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매일 같이 다짐했다. 물론 이 다짐이 매번 실천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마음가짐이라도 그렇게 갖는게 시작이라고 스스로의 노력을 인정하고 더 잘해 보자고 다잡았다.
끝이 있을까 싶었던 팬데믹은 서서히 마지막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회사도 서서히 정상화되고 있었고 그의 출근도 전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자신의 궤도에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회사와 집만을 오가며 노력했고, 아이의 분리불안 증상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1년만 있다가 원래 부서로 돌아가겠다는 원래 계획이 무색하게... 회사을 옮긴지 어언 4년차에 접어들었다.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회사에서 느끼는 혼탁한 공기와 상황은 이제는 별다른 임팩트를 주지 않을만큼 익숙해지는 듯 했다. 내가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고 이런 혼탁함을 맑게 바꿀 수 있을거라는 생각도 감히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내 친구들과 즐겁게 놀던 놀이터를 빼앗긴 상황이었고, 그 놀이터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했다. 회사 생활에 대해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나만의 의미와 소명은 내려놓았다. 무엇이든 포기하는 건 나쁜 거라고 생각해왔던 나인데, 이제는 돈을 버는 행위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쉼이 필요했다. 조금 떨어져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도망가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래도 되지 않나? 안 될 이유가 없다‘ 라는 반문이 들었다.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마지막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남편의 회사생활도 정상화되었다. 회사에서의 이동과 4년이라는 시간과 팬데믹을 거치며 많은 혼란과 상처를 얻었다. 스스로를 돌보고 치유하지 않으면 다시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동안 달리기만 했던 회사에서 잠시 나와 나와 아이, 우리 가정을 돌볼 여유를 가질 시간이 절실했다. 당시 나의 상사는, ’조금만 더 버티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이만큼 고생했는데 얼른 임원이 되어야지‘라며 휴직을 만류했지만, 회사가 더이상 의미가 큰 공간이 되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나 자신을 더 갈아넣을 자신도 없었다. 나는 주변의 만류를 뒤로 하고 육아휴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