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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왕초보 엄마

워킹맘, 의존적 육아의 시작

by otium


어떻게 그런 환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아가를 분만하기 전까지 나는 아이가 태어나면 갓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우윳빛 피부에 빨갛고 앵두 같은 예쁜 얼굴로 방긋방긋 웃고 있는 줄 알았다. 분만실에서 아이와 처음 만난 그 축복 가득한 순간과 그 이후에도 여전히 쪼글쪼글하고 빨갛게 살짝 불어 있는 얼굴에 군데군데 붙어 있던 하얀색의 각질 같은 태지가 살짝 충격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다만 ’태어날 때 태지가 붙은 아이들 피부가 좋다. 더 지나면 예뻐진다‘ 등등 어른들/의사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에 약간의 안도를 했고, 그 이후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가 환상을 갖고 있던 뽀송뽀송한 흰 피부로 거듭나며 미모를 드러내는 아가의 모습에 마음이 조금씩 놓였다. 내 아이에게도 외모지상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나 싶기도 하지만, 아가의 손가락 발가락 눈코입 모두 정상인 걸 확인하고 난 이후에는 그런 자잘한 것들도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 쓰였더랬다. 더구나 정체를 모르겠는 각질처럼 생긴 (처음 들어본 단어) 태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할아버지들에게나 있을법한 미간 바로 아래 콧대에 깊게 패인 일자주름은 특히나 신경이 쓰여 혹여라도 안 없어질까 봐 내내 신경이 쓰였었던 기억이다.

** 사실 지금까지도 ‘정말 별 거 아닌 일들에 사서 걱정하는’ 그런 시간들은 아이가 꽤 큰 지금까지도 왕왕 생겨난다. 얼굴의 작은 상처에도 혹여나 흉터가 남으면 어쩌지... 중이염이 심해지는 것처럼 보이면 혹시라도 청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등등 정말 사소하고 내가 직접 겪었으면 무심하게 넘겼을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내 아이에게 생기게 되면 한 없이 섬세하게 예민해지는 나를 보며 새삼 놀라기도 하고 반성도 하고,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 현실에 안도하며 감사해하는 상황들이 이따금 반복된다. 그리고 몇 번 아이가 어릴 적 호들갑을 떨고 나서는 웬간해서는 나 혼자 마음속으로 끙끙하다가 마무리되는 상황으로 종료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나를 보며 어느 순간 문득..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평생을 이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나를 유난이라고 스스로 비난하거나 이상해 하기보다는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하튼..

자연분만 후 컨디션이 꽤 힘들었지만, 3일 차가 되니 그래도 좀 살만해져 갔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지 3일 뒤 같은 병원 꼭대기 층, 미리 예약해 두었던 조리원으로 이동했다. 조리원 입소(?) 후에는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일들과 알아야 하는 육아 상식과 각종의 실습들, 그리고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육아 베테랑 선생님들께서 아이를 잘 케어해 주셨기에 몸이 힘들 일이 크게 없었지만 "아이를 안고 먹이고 트림시키고 씻기고 마사지시켜주는 일련의 프로세스와 얼마나 먹여야 하는지/안을 때 어떤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지/발진이 나지 않도록 어떻게 쾌적한 피부 관리를 하면 되는지 등등", 아이의 생존은 물론 안락한(?)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알아야 할 일련의 일들에 대한 끊임없는 가이드와 집에 가기 전 숙지하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는 엄마가 아이를 안고 수유를 하는 모습이 참으로 자연스럽게 보였기에 나 역시도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응당 아이를 낳고 나면 바로 그런 베테랑의 자세가 배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모성애가 바로 발현되며 그 순간부터 '엄마'로써의 강인함과 의연함을 갖출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상상했다. 그리고 분만 때까지 알고 있던 환상에 연이어 이 역시도 내가 잘못된 환상을 갖고 있었다는 걸 첫 수유 시간 때 깨달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목도 못 가누는 아가를 어찌어찌 안고 정말 어색하게 수유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이게 엄마로서 상상했던 나의 모습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아가와 며칠을 지내보며, 작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엄마다움'이나 '모성애'라는 건 아이를 낳는다고 자판기처럼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점차 쌓이는 라뽀와 애정, 책임감.. 뭐 이런 부류의 감정들일 거라는 것을.. 사람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기계가 아니기에 새로운 경험들을 하며 그 과정에서의 깨달음과 감정들이 축적되어 내가 꿈꾸는 환상 속 어머니 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사실, 아이를 낳고 마주했던 가장 큰 의사결정은 ‘완모 여부’였다. 모유수유를 하는 갖가지 장점들이 열거된 블로그/카페 글과 전문가분들의 조언을 많이도 봤지만 여러 상황을 놓고 볼 때 완모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0년대 초반, 나는 꽤나 오픈되어 있는 문화의 괜찮은 복지를 제공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이를 낳고 바로 육아휴직하는 일이 흔하지는 않을 때였다. 갓난쟁이 때보다는 학교에 가는 시기에 옆에 있는 게 낫겠다는 판단으로 출산휴가까지만 회사를 쉬는 것으로 계획했던 터였기 때문에, 복직 전까지 혼합 수유를 하고 이후에 분유 수유를 하기로 했다. 분유를 먹인다고 하면 그다음에는 그냥 적당한 걸 골라 먹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해외에서 유명하다는 몇 가지 분유들과 유기농 여부, 일반분유냐 산양분유냐, 어떤 젖병과 젖꼭지를 쓸 것인가 등등의 비교까지... 아이가 먹는 것이니 알아야겠다 싶어서 검색을 시작하는데 종류는 왜 그렇게 많고 분석 정보들도 넘쳐나는 상황에 한 번 더 멘붕을 겪었던 기억이다. 나는 꽤나 빠르고 단호하게(?) 결정하는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결혼을 준비하던 때에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언어를 통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아이를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영양을 잘 챙겨 길러내야 하는, 내 인생 맞닥뜨린 가장 중대한 Mission 앞에서 한 없이 우왕좌왕했다. 그럼에도 중심은 내가 잡아야 하니, 몇 가지 기준을 세워 분유와 젖병 등을 결정하고 준비했다. 생각해 보면 조리원 들어가기 전에 사전 준비가 필요했나 싶었지만, 일단 그 정도의 예측이 잘 되지 않던 시기였던 것 같다. 먹는 문제 외에도, 아이를 씻기는 목욕 용품들과 발진 없이 뽀송뽀송한 엉덩이를 책임져 줄 기저귀 등등 고관여의 의사결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준비 시절에도 잘 방문하지 않았던 블로그/카페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 사용량도 덩달아 늘어갔다. 아가를 보는 시간과 산후 마사지와 스트레칭 시간 외에는 계속해서 검색하는 무한 검색에 빠진 시기였다.


그렇게 나만의 환상을 깨고 폭풍 검색을 거치며 준비물들을 챙기는 퀘스트를 하나씩 완수해 나가며 우리 아가를 안고 먹이는 일들이 제법 익숙해질 즈음.. 2주 동안의 조리원 생활이 끝나고 나와 남편은 새로운 가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갈 때 단출했던 우리 차 안에는 아가를 위한 카시트가 설치되어 있었고 트렁크에는 아이 용품들이 가득했다. 눈발 날리던 새벽, 진통을 느끼며 남편과 아이를 낳으러 병원으로 향했던 그 날, 우리 아가가 탄생한 그 역사적인 날로부터 약 20여 일만에 돌아온 우리 집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내 품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 천사와 함께 들어서니 그 공간의 분위기가 모두 바뀐 듯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첫 날 깨달았다. 아가를 키우는 건 엄청난 체력전과 스스로에 대한 불안의 시간이 될 거라는 것을..!!


주간에는 미리 섭외해 놓은 베테랑 산후조리 전문 이모님과 엄마가 함께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 하는 것을 도와주셨지만, 처음 경험하는 상황들에 참 많이도 막막했다. 아이의 수유량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생활 패턴은 언제 어떤 식으로 잡힐 지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전혀 없으니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고, 계획했던 양을 다 먹지 않으면 도대체 왜 그런지? 수유량을 어떻게 늘려야 할 지? 먹고 나서 트림을 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배변을 하지 않는 건 왜인지? 도대체 왜 우는건지!!! 모든 것이 ‘몸으로 말해요’ 수준으로 관찰하고 추측해서 대응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너무나 생경하고 어려웠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아이에게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내가 잘 키우고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전혀 모르던 때였다. 온전히 내가 계획하고 그저 나 혼자 알아서 잘해 내면 되었던, 이전까지의 삶의 패턴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것이라 더 많은 당혹감과 좌절을 느꼈던 것 같다. 집에 온 당일부터 아이는 저녁 9시 언저리 즈음이 되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내가 안아줘도 울음을 잘 그치지 않았고 어찌어찌 몇 일은 넘어갔는데 계속되는 패턴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며칠 후 그날도 계속 울어대서 안고 달래 보다가 마침 늦게까지 같이 있어주던 엄마에게 “얘 정말 어디가 아픈 거 같은데 응급실이라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ㅠㅠ“ 하고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 나를 보고 엄마는 뒤에서 어이없다는 듯 단호하게, “그냥 배앓이야. 이 시기에 이런 일들 많으니 호들갑 안 해도 돼” 라며 아가를 무릎 위에 안아 올리고는 배를 살살 쓸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이는 어느 순간 울음을 그치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이 들어도 두세 시간마다 울어대는 아가를 챙기느라 덩달아 잠을 못 자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다들 왜 그렇게 ‘백일의 기적’을 기다렸는지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아잉의 통잠을 바라기는커녕, 저녁 9시 공포의 배앓이와 갖가지 사소한 상황들에 당황해서 병원에 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왔던,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나를 잠식했던 시기는 두어 달 정도 이어졌던 것 같다. 이전과는 다른 생활 패턴에 더 예민해져 있었고 출근한 남편 대신 내가 온전히 아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그 상황도 생각보다는 내가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 왕초보 엄마의 상황을 알고 위로를 해 주는 것인지.. 우리 아가는 하루하루 다르게 뽀얗고 예쁘게 무럭무럭 성장해 주었고 눈을 맞추고 옹알이라도 해 주는 날에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정말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집에 오고 아이를 잘 먹이고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나는 정말 완벽한 ‘기록형 인간’이 되었다. 행여 수유 시간을 놓칠까 먹은 양과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했고 두어 달이 지나며 안정궤도에 들어선 아이의 발육 상태와 잘 크고 있다는 주치의선생님의 피드백, 그리고 어느 정도 루틴으로 자리 잡은 생활 패턴을 경험하고 나서야 약간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나에 대한 확신이 없던 초기 몇 주의 시간 동안은, 아이가 자는 동안 항상 스마트폰을 들고 온갖 육아 후기와 온라인에 올리는 엄마아빠들의 경험담을 중독적으로 읽어 보며 유사 상황에 따라 해보기도 참 많이 했다. ‘아기가 잘 때 마사지해 주면 좋다는 말을 따라 하다가 잘 자는 잠만 깨워서 울리거나/ 잘 쓰고 있던 아가 젖꼭지를 더 좋다는 걸로 괜히 바꿔 퉤~하고 뱉어내게 만들고/ 아이 울음소리만 듣고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는 말에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해석하려고 애쓰는 등등’ 이 말 저 말에 기꺼이 마구마구 휘둘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아이가 울기 시작하고 도대체 얘가 왜 우는지 ‘나름 추정’ 해 보려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냥 안아주면 돼!"라며 내 등짝을 때린 엄마의 꾸지람에 정신이 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가 없긴 하지만... 뒤늦게 남 정신을 차린 나는, 점차 스마트폰에 떠도는 정보들에서 주의를 떼고, 아이와 나의 합을 맞춰가는데 집중해 보기로 했다. 한 달 여에 걸쳐 왕초보 엄마는 바보 같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주 조금은 아가를 기르는 감을 잡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엄마는 친정 집으로 가서 나머지 휴직 기간을 지내라는 제안을 하셨다. 출산휴가 뒤 복직을 하기로 결정하기도 했고 복직 후에는, 정말 감사하게도 엄마아빠께서 우리 아가를 길러주시기로 기꺼이 나서 주셨던 터라, 어차피 갈 거면 그냥 빨리 가자는 말씀을 꺼내신 것이다. 남편도 출장에 회식에 늦게 오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 혼자 아이를 보는 상황이 안쓰럽기도 하셨던 것 같다. 모든 집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의 상황에 국한해서 보자면 ‘갓 태어난 아가를 키우는 상황에서 ’남편/아빠의 역할‘이란 참으로 그 범위와 역할이 좁을 수밖에 없구나’ 라는걸 느끼는 시절이기도 했다. 그도 최선을 다 했겠지만 종일 같이 있는 내가 아이의 컨디션을 살피는데 더 섬세하게 반응했고 그는 보조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현실 세계에서 나름 적응을 하며 생활 패턴을 새롭게 세팅하고 계셨던 우리 아드님께서 아빠의 회사생활을 배려해서 처음부터 밤에 통잠을 자거나 할 리 만무했으니 남편은 작은 방에서 따로 자고 있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수유하고 아이를 다시 재우는 일들은 내가 도맡아 한다고 나섰으니 내 체력은 점점 떨어졌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집 밖에 나가야 했던 나였는데 하루종일 집에서 아이와 있으며 24시간을 온전히 육아에 전념하며 ‘자발적 은둔 생활‘의 시간이 축적될수록 나의 ’고립감‘도 쌓여갔다. 그럼에도 아가를 보면 ‘정말 천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어느 날 문득 주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다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여전히 화려하고 역동적이고 전과 다를 바 없는데 나의 일분일초는 이제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 체감되기도 했고 혼자 뒤처지고 있는 것 같다는 조바심도 조금은 커져 갔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상황이 엄마아빠 눈에는 보였던 것 같다. 부모님은 친정에서 지내면서 복직 전에 운동하며 컨디션도 더 챙기고 이따금 나가서 바람도 쐬고 아가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자는 제안을 해 주셨고, 그렇게 나와 아이는 친정 집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우리 집과 친정이 매일 왕래할 거리는 아니었기에, 장인 장모님의 제안에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주말에 나와 아이를 보러 오는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제안을 고사하지 않고, 화색이 돌았던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오해였겠지??!!!)


오랜만에 도착한 친정 집은 엄마아빠가 손주를 맞이하려 살뜰하게 준비해 놓으셔서 우리 집보다 훨씬 더 쾌적하게 느껴졌다. 휴직 기간이 끝나면 가야 하는 나를 배려하셔서 아이와 함께 지내라고 라텍스도 새로 사고 아가용품과 장난감들이 가득한 아이 방을 꾸며 놓으셨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길게 친정 부모님께 우리 아가의 육아를 의탁하게 되는, 워킹맘의 의존적 육아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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