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행복과 소명을 찾아서
30대에는 그저 눈 앞에 주어진 일들에 충실하고 열심히 살면 40대, 50대, 60대 아무런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그 동안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살고 있다고 자부했고 지금 내가 조금 더 힘든만큼 이후의 삶은 여유와 풍요가 가득할 거라 믿었다. 나에게 나이듦이란 기다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40대가 되어보니 나의 방향이 맞았던가? 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겉에서 보기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번듯한 학교를 졸업했고 100:1이 넘는 경쟁율을 뚫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했던 직장을 얻었다. 직장에서도 나름 승승장구하며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직책을 얻었고 적지 않은 연봉과 인정을 받으며 적정수준의 자존감을 유지하는 직장생활.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는 전문직 남편. 건강하고 멋지게 밝은 모습으로 잘 자라나고 있는 아이까지.. 경제적으로 어렵던 학창시절, 남편의 유학을 온전히 감당하며 쪼들리던 과거에 비하면 진심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한 사람인지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였다. 겉모습은 그저 겉모습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는 15년 여 동안 나는 10년 넘게 가장 높은 고과를 받아왔다. 내가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몰입한 결과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막상 회사의 경영활동이 이루어지는 상황들을 알면 알수록, ‘과연 이 일들이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올라왔다. 나는 그저 저 구석에 보이지 않는 장깃말, 졸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온 신경을 쏟는 이 일들은 내 것인가? 내가 이 곳을 나서면 나에게 남는건 과연 무엇인가? 다른 곳에서도 일할 수 있는 경력? 그것이 무슨 의미이지??’ 라는 질문에 확신을 갖고 답을 낼 수 없었다..
도시의 화려한 모습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최신의 오피스 빌딩... 처음 그곳이 발을 디딜 때 내가 그 공간에 속한다는게 퍽 좋았던 기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사옥 중에서도 일반 임직원들은 출입하기 어려운 곳들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된 그 무렵부터 내 안에 회의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나? 나만의 것은 무엇이지? 내가 여유롭게 하늘을 올려다 본 게 몇 일이나 될까? 나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살고 있나? 이렇게 내 방을 얻고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얻으면 행복해지는건가?’... 눈 깜짝하면 한 주가 지나갔고 회색 겨울이 끝나고 만개하는 개나리, 벚꽃.. 짙어지는 녹음과 단풍의 향연은 출근길 올림픽대로에서 아주 잠시 지날 뿐이었다.
회사에서 생활하는 공간이 화려해질수록, 집에서 내 손이 닿는 공간은 점점 줄어갔다. 나의 인생을 고민할 시간도 줄어갔다.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회사 전체의 전략과 로드맵은 공들여 짰지만 내 삶의 로드맵은 고민하지 못했다. 니런 문제의식조차 희미해져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나에게 늘 ‘피부가 더 좋아졌다.’ 이야기해주었다. 출근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 머물다보니, 해를 잘 보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만성 비타민D 부족으로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매일 밤 늦게 재회하는 우리 세 가족은 그 날 그 날 있던 일들을 나누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가 자라날수록 못 다한 숙제를 봐주어야 했고 아이가 학교에서 어떤 친구들과 무슨 놀이를 했는지 요즘의 고민과 흥미는 무엇인지, 등등을 소소하게 나누며 대화를 하기엔 늘 다음날을 준비하고 아이를 재우기에 바빴다.
나는 왜 살고 있는걸까?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까? 나는 즐거운가??
어린 시절 생각했던 방향대로,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갖고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좋은 환경에서 기르면 행복한 것이라 믿었다. 그 동안 그렇게 숨가쁘게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나를 보고 있자니 ‘나는 어떤 사람이지? 뭘 잘하는 사람이지? 어떨 때 가장 즐겁지?‘ 등등 나에 대한 질문에 이렇다할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내 안에 허무가 쌓이고 있었다.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그저 눈 앞에 해야할 일들을 해 내기에 급급했다. 그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어른이 되는 역할 놀이에 정신이 팔려 내가 ’진짜 나‘를 생각하는 중요한 일는 정작 잃어버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엄습해 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꾸뻬씨의 행복여행‘을 꺼내 들었다. 대학 시절 읽고는 오랜 시간을 덮어 두었둔 책이었다. 대학 시절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꾸뻬씨가 진료한 대도시의 현대인들과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회색빛으로 살고 있지?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의 인생은 정신과에 찾아오는 불평불만의 현대인과는 다를 거라 자만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나 다시 책을 펼친 나의 모습은, 어느새 매일매일을 쳇바퀴 돌 듯 살아가며 그저 행복하지 않다고 투덜대는... 소설 첫 챕터에 나오는 도시의 군중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일단 잠시라도... 나를 짓누르는 굴레에서 벗어나 있자’ 결심했다. 서울에서, 학군지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간다. 소설의 꾸뻬씨처럼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탐구정신으로 곧장 여행을 떠날 처지가 못 된다. 미혼도 딩크도 아닌 나의 고민 시간은 꽤나 길었다. 내가 잠시 멈춤으로 인해 가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기미가 있다면 이 생활을 지속하면서 삶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보자 노력했지만, 지난 몇 해 동안 나의 노력은 지지부지했다.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일정 기간 나는 이 트랙에서 나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회사생활이 마라톤이니 너무 전력투구하지 말라던 선배들의 말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나는 조금은 지쳤고 속은 꽤나 망가진 것 같으니 잠시 트랙에서 나와 숨을 고르고 있어야할 것 같다고... 이 방향으로 계속 뛰어야할 지 다른 트랙을 찾을 지 고민해 보겠노라고.
남편은 곧바로 선뜻 그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몇 주가 지나서야 그는 비로소 내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동안 고생했으니 일단 잘 쉬어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의 멈춤이 가져올 경제적 여파도 고민 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만의 행복이 내가 추구하는 삶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찾아나서길 시작한다. 무엇부터 할 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조바심을 내거나 나를 재촉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저 이 헤매임 속에서 나 아닌 누군가의 눈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이 아닌, 내가 온전히 바라는 내 모습이 무엇인지 찾길 바랄 뿐이다.
‘워킹맘 연대기’의 글은 나의 20대 말~30대 동안 있던 일들을 어딘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었다. 그리고 글을 써내려가며 나의 지난 20여년을 돌아보니, 나는 ‘실수는 용납해도 실패와 불확실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온 듯 하다. 그럴만한 여유가 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갈급은 안정지향적인 나의 습성은 자본주의 세상의 경제적인 가치에 연결된 것들이었다. 다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 시간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내 삶의 본질을 재정립할 생각을 할 수 있었으리라 여긴다.
지금도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진 못하지만, 이만큼 살아보니 내가 원하는 삶이 번듯한 직장과 안정된 경제적 환경이 모든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떻게든 굴러가겠지.. 라는 무책임함을 인생 최초로 가져보는 중이다.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힘들더라도 해냈을 때 내게 충만함을 주는 일들이 무엇인지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나에게 지속가능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도록 사유하고 경험하며 깨닫기 위한, 남은 삶을 위한 쉼과 재정비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