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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더와 스컬리 Sep 18. 2021

착한 딸, 나쁜 엄마

몰랐던 마음/치과에 얽힌 마음/에세이

아이들의 충치를 치료하는 날이다. 어린이 치과는 대기가 길어서 일반 치과로 왔다. 열한 살 아들과 일곱 살 딸, 아이들은 몇 년 전부터 일반 치과를 이용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참을성이 좋아서 가능한 일이었다. 두려움에 양 손을 맞잡고 꼬물꼬물 거리지만 입을 쫙 벌리고 아프다는 내색을 않는다. 자의적인 참을성인지, 나의 강요에 의한 참을성인지, 그런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걱정스럽다.


4:30분, 예약 시간에 맞춰 치과에 도착했고 텅 빈 대기실에 아이들과 나란히 앉았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치과라고 하기엔 너무 향긋한 냄새가 났다. 문득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치과가 이렇게 향기로웠지?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치과가 두렵다. 열 살 무렵에도 아플 때면 혼자서 병원에 다녔고, 주사도 척척 맞던 아이였지만 치과만큼은 무서웠다. 치과에 들어서면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요란한 드릴 소리에 압도당했다. 차가운 시멘트 벽에 붙은 사각 스툴 의자, 수시로 들려오는 쇳소리, 그곳은 모든 것이 차가웠다. 일렬로 기대앉아 대기하는 동안 나는 수없이 상상했다. '저 드릴로 내 치아도 갈아버리겠지. 이번에도 불쾌한 마취주사를 놓을까. 사정없이 긁어대는 갈고리가 어쩌면 입벽을 찢어 놓을지도 몰라. 얼마나 아플까.' 상상했고 두려웠다. 한 시간쯤 기다리다 보면 치료를 받기도 전에 진이 빠졌다. 긴장감에 몸은 굳었고, 입은 바싹 말랐다.


기다리는 순간이 너무 공포스러워 차라리 내 차례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막상 이름을 부르면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의자인지 침대인지 모를 치료 의자에 누워 입을 벌릴 때면, 나는 무력했고,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엄마가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고 가끔은 생각했다. 그러나 말하지 못했다. 엄마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바쁜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나는 그런 딸이었으니까. 이해하지만 때로는 마음이 시렸다. 그런 사소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서 내 마음속 바닥 깊이 잔잔한 슬픔으로 남지 않았을까. 아이에게는 그런 감정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충치가 있는지 살피려고 우선 사진을 찍으신대. 처음 하는 거라 낯설겠지만 아픈 건 아니야. 충치가 있어서 치아를 살살 긁어내신대. 그리고 빈자리에 네가 갖고 놀던 클레이처럼 말랑말랑한 걸로 예쁘게 채워 넣으신대. 주사 한 방 꾹 맞을 때 따끔하고 그다음은 괜찮을 거야. 드르륵드르륵 씁씁 소리가 나겠지만 아프지 않을 거야." 알고 있는 모든 과정을 설명했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아이를 안심시켰다.


기다림의 시간이 끝이 나고 딸아이가 먼저 진료실로 들어갔다. 치료 의자에 누은 아이는 긴장한 듯 보였다.

"엄마,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요."
"무섭지 않게 엄마가 손잡아 줄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뒤늦게 옆자리에 앉은 아들과 딸을 오가며 아이들 곁을 지켰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아이에게 얼른 다가가 손 잡아주고 잘하고 있다고 다독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치료를 잘 끝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아이에게 말하며 속으로 나에게도 칭찬해줬다. 꽤 괜찮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숙제를 끝낸듯한 홀가분함까지 더해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 시간, 딸아이 입술 한쪽이 이상할 정도로 퉁퉁 부어올랐다. 아이는 마취된 입이 신기해서 물고 빨은 것 같다. 마취가 풀릴 때까지 씹지 않게 잘 봐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치과에서도 큰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알거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당부가 없었다. 부은 입술은 차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해지고 안쪽은 구내염이 생겼다. 밥을 먹을 때면 가끔 따갑다고 했지만 평소처럼 그럭저럭 잘 먹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며칠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도 했다. 그렇게 사흘쯤 지났을까. 쉽게 나을 줄 알았던 아이의 상처는 어쩐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이도 이제는 조금 아프다고 했다. 하필 주말이라, 집에 있던 부루펜을 몇 번 챙겨 먹이고 월요일을 기다렸다.


월요일 아침, 상처를 찍은 사진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께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아고, 엄청 심하네요. 이 정도면 그냥 두면 안 돼요.
약도 꼭 먹이고 연고도 발라줘야 합니다.
 이 정도면 아이가 너무 아파서 팔짝팔짝 뛰었을 텐데요?"

"아… 네. 아프다는 얘기를 별로 안 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고 의사 선생님의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다. 처방전을 받고 약을 지어서 돌아오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 가슴을 찔렀다. 딸아이는 팔짝팔짝 뛰기는커녕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가끔 따갑고 아프지만 괜찮다고 했었다. 넌 대체 얼마나 참은 거야. 혼자 참았을 아이를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마스크 안은 눈물과 콧물로 축축해졌다.


아이는 왜 그렇게까지 참았을까. 며칠 지나면 괜찮을 거라는 엄마의 말을 굳게 믿었을까. 아이가 살짝 다쳐서 올 때면 괜찮다고 그냥 두면 낳는다고 했던 그런 기억들 때문이었을까. 아파하는 아이의 표현을 내가 놓쳐버린 건 아닌지. 마음이 복잡했다. 괜찮다던 아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살피지 않은 내가 바보 같았다. 혼자 삭히고 참아내던 나를 생각하며 아이들도 나와 같길 강요했던 건 아닐까. 괜찮다 괜찮다는 말로 괜찮지 않은 아이를 입막음한 건 아닌지…


아이에게 성숙함을 강요하는 나는 다정한 듯 가혹하다. 나는 착한 딸이었지만, 나쁜 엄마였다. 나의 엄마와 내가 다르듯, 아이는 나와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아이의 아이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언제나 실천은 어렵다. 아이에게 해를 비추는 엄마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해를 끼치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은데...


아이의 입안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서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상처가 커서 낫는데 시간이 꽤 걸릴듯하다. 나는 이제야 약을 챙기고, 자극적이지 않은 메뉴를 생각하고, 상처를 정성껏 돌본다. 마음의 상처도 이렇게 돌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잠들려는 아이들을 괜히 쓰다듬으며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킨다.  

'엄마가 서툴러서 미안해. 너희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게 엄마가  잘할게. 사랑해, . 사랑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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