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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더와 스컬리 Aug 24. 2021

제주유기농말차크림프라푸치노/부부싸움/월간샘터

에세이/스타벅스/월간 샘터 8월호 행복일기 게재

월간샘터 8월호 행복일기 게재


이름도 생소한 '제주유기농말차크림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를 주문했다. 동생이 보내준 무료쿠폰이 만료기한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무릇 무료쿠폰이라 함은 제일 비싼 음료를 마셔야 한다고 들어왔다.


종종 오는 스타벅스였지만, 매번 아메리카노 아니면 카페라테를 마셨기에, 대체 뭘 주문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검색했다. '스타벅스 무료음료쿠폰'


사람들은 그걸로 뭘 주문했을까. 궁금했다. 몇몇 블로거의 글에서 '제주유기농말차크림프라푸치노'를 추천받았다. 처음 먹어보는 음료였지만 망설임 없이 추가 요금을 내고 사이즈업을 했다. 그날은 제법 긴 시간 그 공간에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남편과 사소한 신경전이 있던 날이었다. 아이들의 간식을 챙겨주고 읽을 책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좀처럼 혼자 외출이 없어서 아이들이 궁금해했다. 엄마 어디 가냐고 같이 가고 싶다고 하는 아이들에게, 그냥 이곳저곳 갈 건데 밤에 돌아올 거라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길을 걷는데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 한 칸 챙겨 나온 티슈로 눈물을 찍어가며 주머니에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이런 순간에도 무료쿠폰에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이 어이없었다. 초등학교 사 학년, 사회시간에 '기회비용'을 배운 이후로 소비를 할 때면 난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노력했다. 최저가를 찾아 헤맸고, '저비용 고효율'을 선택하려 애썼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불행해졌다. 슬픔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고 '무료쿠폰'에 최선을 다하다니. 못났다. 정말.


주문을 마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었다. 어디냐는 질문에 그냥 커피숍이라고 답했다. 어디인지 알리고 싶지 않은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커피숍이냐고 다시 물어와서 어쩔 수 없이 스타벅스라 말했다.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아이들 간식 얘기를 간단히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프라푸치노를 세 모금 마셨을 무렵, 마주 보는 자리에 갑자기 남편이 나타났다.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뭐 때문에 섭섭해하는지 이유도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른 내가 걱정돼서 왔을 것이다. 남편은 핸드폰에 사진을 먼저 내보였다. 오전에 다녀온 칼바위 사진들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가파른 바위들을 오르다가 정말 죽을 뻔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티슈로 눈물을 찍으며 입은 웃으며, 우리는 남편의 등산에 대해 시시한 얘기를 나눴다. 아홉 장의 티슈를 적셨고 그사이 마음이 풀어졌다.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시시하다. 뭐 때문에 화났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고 토라져 있으면 남편이 먼저 다가온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미안해하는 마음을 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풀어진 마음을 아는 것 같다. 반도 못 마신 프라푸치노를 남편에게 건넸다. 한 모금 쭈욱 들이키더니 남편은 집으로 가자고 했다.


큰맘 먹고 나선 가출 같은 외출이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어쩐지 그냥 들어가긴 좀 그랬다.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그냥 좀 그랬다. 하루 종일 읽으려고 무겁게 챙겨 나온 책을 조금 더 읽다가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남편을 먼저 들여보냈다.


남편이 가고 펼친 책엔 때마침 <평범한 결혼생활>을 출간하신 임경선 작가님의 인터뷰가 있었다.


"결혼 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기술적인 조언이 있다면요?"

"... 서로의 몸을 만질거리가 있는 것이 좋아요. 예를 들어 손톱을 깎아주거나 귀 청소를 해주거나 상대의 흰머리를 뽑아주거나 어깨를 주물러주는 것 같은 돌봄 있잖아요. 저는 그게 굉장한 애정인 거 같아요..."


인터뷰를 보며 우리 부부의 지난 십 년이 스쳤다. 아침밥은 못 챙겨주지만, 나는 가끔 남편의 손발톱을 깎아준다. 가끔 발을 씻겨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친 남편의 다리를 주물주물한다. 남편은 자주 체하는 내 손을 만져주고, 자주 뭉치는 내 어깨를 조물조물해준다. 표현이 부족한 우리가 애정 하는 방법이다.


상했던 마음을 날려버리고, 기분 좋게 다음 책을 집었다. 한 시간쯤 책을 읽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엔 주민센터에 들러 폐기물 스티커 두 장을 샀다. 떡볶이를 만들고 있다는 남편의 문자를 받고, 아들이 먹고 싶다던 어묵을 샀다. 딸이 좋아하는 순대도 샀다. 내가 좋아하는 내장도 넣고 싶었지만, 딸을 넉넉히 먹이고 싶은 마음에 결국 순대만 달라고 했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던 한 여자의 외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는 돌아오는 길에 다시 주부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


여자의 하루에서 달콤 쌉싸름했던 '제주유기농말차크림프라푸치노'의 맛이 났다.




<이 글은 월간샘터 8월호 행복일기에 게재된 '프라푸치노처럼 달콤 쌉싸름했던 외출'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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