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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May 02. 2023

내 삶을 리폼하는 시간

나의 갱년기에게

 삶을 즐기는 것은 ‘~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그리고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김해남메이븐, 2022, p57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래, 맞아! 바로 이거지!’하며 손뼉을 쳤을 나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하고 싶다’라는 자발적 욕구를 누구보다 사랑하던 나였다고 자부한다. 투병 중에도 덜 아픈 시간이 있다며 그 시간을 활용해 책을 썼다는 김해남 선생님의 진실성과 간절함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나는 책의 빈 여백에 이렇게 쓴다.


  “나이가 드니 ‘~하고 싶다’라는 욕구가 사라진다. 기쁜 일, 가슴 뛰는 일이 없어지고 그저 ‘~해야 한다’라는 일상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고마워진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을 테니까. 갱년기, 세 글자가 그렇게 나를 덮쳤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줄 몰랐다. 요즘은 이런 나에게 마음껏 실망하는 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장을 다니는 중에 시간을 만들어 혼자서 기차여행을 했다. 어설프게나마 여행에 대한 시간을 책으로 펴냈고, 두 번째 책을 준비하던 나였다.


  두 번째 책은 삼 분의 일에서 멈춘 지 오래다. 역시 기차역과 관련된 책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지독한 무기력함이 온몸을 휘감아 일상을 떠나 혼자서 여행하는 일이 버겁기만 했다. 지금은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중이다. 내 몸과 마음이 다시 활기를 찾을 때까지, ‘하고 싶다’라는 의지가 ‘해야 한다’는 의무를 이길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몇 해 전 전라남도를 여행할 때 단체 여행객을 만난적이 있었다. 갖가지 봄꽃들이 주위를 덮던 때라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친구들과 여행을 온 것처럼 보이는 아주머니가 무심한 듯 한마디 툭 던졌다.

  “그게 그거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그랬더랬다.

  ‘그게 그거면 그냥 집에 있지, 힘들게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아주머니는 아무래도 갱년기 우울을 느끼던 때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에 흥미를 잃게 되고,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무조건 집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고……. 그게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친구들과 여행길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감탄을 모르는 삶, 어쩌면 살아있으되 죽어있는 것처럼 사는 삶인지도 모른다. 겨우내 얼어있던 땅을 뚫고 돋아나는 새싹의 생명력에 환호성을 지르고, 붉게 떠오르는 태양의 몸짓 앞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에 모을 만큼 심장이 뛰고, 세상을 촉촉이 적시는 비의 나들이에 마음을 맡기는 삶. 지금까지 나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쉬는 날, 도서관에 앉아 저녁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줄 모른 채 책장을 넘기는 하루, 배낭을 둘러메고 가고 싶은 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하루, 새벽을 흔드는 알람을 듣고 벌떡 일어나 커피를 내려 노트북을 펼치던 열정적인 하루. 앞으로도 가슴에 불꽃을 간직하며 살고 싶은데 요즘은 불씨가 다 꺼져진 잿더미처럼 생활하니 문제다.


  새 다이어리의 제일 뒷장에 올해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본다. 작년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 일이 참으로 많았는데 이제는 생각나는 게 없다. 어쩌면 이제는 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저 편하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싶은 욕구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생기는 분주함과 피곤함을 눌러버린 게 아닐까. 마음이 늙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음 한 귀퉁이가 터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수선을 해서 남아있는 삶을 잘 살아내야 한다.


  산부인과를 찾아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약한 우울증 약이라며 처방전을 내주셨다. 약을 먹으니 기분은 한결 나아졌지만, 예전처럼 뭔가를 하고자하는 의욕이 넘쳐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하고 싶고, 느끼고 싶고, 알고 싶은 것도 없이 ‘그게 그거’인 채로 삶을 살기에는 남은 날들이 너무 많다.


  내가 아닌 듯 생활하고 있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몇 년 전 다이어리를 펼쳐보았다. 내 삶의 버킷리스트라고 적힌 메모가 보인다. 영어 회화 배우기, 퇴직 전에 책 두 권 더 내기가 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두 가지 모두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꾸준한 노력은 필수요소다. 머리는 영어 회화를 당장 시작하라고, 부지런히 글도 써야 한다고 나에게 이야기한다. 시키는 대로 하면 좋으련만 몸이 영 말을 듣지 않는다. 가슴속에는 피곤해, 이제는 좀 쉬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훨씬 편해, 라고 외친다.


  몇 달이나 기다렸는데도 가슴은 머리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다 타버린 모닥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불꽃이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내가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새로운 장작을 갖다 놓고 종이에 불을 붙여 나무로 그 불꽃이 옮아가길 기다리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무언가를 하면 금방 지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가슴의 불씨를 되살리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인의 말처럼 나이는 들어가는데 열정이 과하면 몸이 감당을 못할지도 모르지만 무작정 아무것도 안하고 쉬어보니 어쩐지 몸과 마음이 더욱 축축 처지는 듯했다. 멀리뛰기의 도움닫기처럼 아주 천천히 뭐라도 시작을 해야 높이 점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불씨를 만드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무기력한 나를 살리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나는 세 가지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만들었다.


  첫째, 무조건 노트북을 펼쳐 하루에 A4용지 딱 반장 분량의 글을 써나간다. 원고가 잘되는 날에도 딱 반장 분량만 쓰고, 앞뒤 문맥이 맞지 않는 글이더라도 무조건 하루 분량을 쓰고 노트북을 덮는다. 물론 무기력한 지금의 나에게는 어려운 실천이다. 절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인다. 조금씩 매일 쓰다 보면 몸에 무리도 가지 않고 왠지 더 쓰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 것 같기 때문이다.


  둘째, 예전에 버킷리스트에 있던 항목을 앞뒤 재지 말고 일단은 시작하고 본다. 시작해보고 몸에 무리가 간다거나 재미가 없거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면 과감하게 그만두면 된다. 나는 시에서 운영하는 영어회화반에 등록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되는 거라 부담이 없었다. 특히 새로운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내 가슴에 열정과 도전의 불꽃을 되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셋째, 잠자기 전, 하루 중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다이어리를 펼쳐 감사했던 일 세 가지를 적는다. 좋은 일들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드는 요즘, 나를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일들만 일어난다고 느껴지는 요즘, 일과를 찬찬히 생각해보니 감사한 순간들이 톡톡 튀어나왔다.


  - 아들과 톡을 나누며 잠시나마 웃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엄마, 저녁 무지 기대할게.’

  - 수영장에서 은주 씨를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감사하다.

  - 식구들이 저녁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감사하다.

  - 아주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았다. 잠시나마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

  - 자기 전에 이렇게 메모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 내 마음의 여유와 활력을 찾기 위해 스스로가 조금씩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 감사하다.


  이제는 내 생활을 내 몸과 마음에 맞게 리폼해 나가야 할 시기다. 무리해서 무언가를 하면 다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욕심을 부리면 안 되고, 신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저기 수선이 필요한 몸과 마음에 갖가지 천을 덧대어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역할일지도 모른다. 예전보다 더 훌륭한 리폼작품을 만들어가며 남은 날들을 살아가고 싶다. 문득 그동안 나중에 차한잔 하자, 라며 만남을 미뤄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나눠주는 것이 아깝다고 여겼던 건 아닐까.


<<그림 박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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