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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Sep 13. 2023

장항선의 마지막 간이역을 찾아서

『청소역』

  이원역, 백원역, 미로역, 고사리역처럼 한 번만 들어도 귀에 쏙쏙 박히는 역명을 가진 기차역들이 있다. 청소역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청소역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진죽리에 있다. 1929년, 진죽리의 이름을 따서 진죽역이라는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고, 1988년에 ‘리’보다 좀 더 큰 행정구역 단위인 ‘면’ 단위의 이름을 가져와 지금의 청소역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까지 철도노선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되지 않은 곳, 다시 말해 아직까지 KTX가 다니지 않는 장항선에 위치한 기차역 중 하나가 청소역이다. 열차는 탈 수 있지만 승차권은 끊을 수 없는 기차역, 무궁화호에 올라 승무원에게 표를 사야 하는 간이역이다. ‘장항선의 마지막 간이역’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역사(驛舍)가 아담하다.


장항선의 마지막 간이역, 청소역의 모습

  긴 세월, 수많은 손님을 떠나보냈을 맞이방의 나무 의자가 멀리서 찾아온 나를 한없이 반기는 듯하다. 작고 단정한 열차시간표는 이곳에서 하루 8번만 무궁화호를 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까지 무궁화호가 다니는 간이역, 이제는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차역 중 하나가 청소역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비둘기호처럼 조만간 무궁화호 역시 역사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람들에게 소리높여 말하고 싶다. 늦기 전에 무궁화호에 몸을 싣고 청소역에 꼭 한번 와보라고. 외국 여행도 좋지만 우리나라에도 추억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차역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이다.


  역사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니 잘 꾸며놓은 철도공원이다. 젊은이들이 말하는 소위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군데군데 코스모스가 피어나기 시작하는 작은 철길과 건널목, 그 길에 걸맞은 기차 모형도 있다. 교복을 차려입은 여고생과 남고생의 중간에 앉아 그들과 친구가 되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널찍한 의자도 준비되어있다. 거기에 광주 민주항쟁을 소재로 2017년에 개봉한 「택시 운전사」의 연두색 개인택시도 당당하게 서 있다. 오래전에 본 영화라 장면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영화가 청소역 앞 거리를 배경으로 촬영되었나 보다. 1980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등장하는 청소역 앞 거리, 기대를 한껏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역 앞에 한 군데 정도는 꼭 있을법한 역전식당이 이곳에도 있다. 역전식당을 마주 보며 또 꼭 있어 줘야 할 것만 같은 반점이 맛있는 짜장면 냄새를 솔솔 내뿜으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헤어샵이나 헤어살롱이 아닌, 미용실이 역전식당 옆에 나란히 붙어있고, 착한가격에 전국택배가능이라고 광고를 하는 식육점도 보인다. 예전에는 별다방이라는 간판을 붙였을 법한 별커피에서 어르신들이 무리 지어 나온다. 한바탕 사는 이야기 나누며 끈끈한 삶을 이어가는 전우임을 확인한 탓일까, 그들의 얼굴에는 탐스러운 모란꽃이 환하게 피어난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지음세계사, 2020, p15.     


  박완서 선생님의 글처럼 청소역 앞의 거리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역 앞 거리가 아직까지 살아 움직이며 사람 냄새 풍기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주민들의 생활공간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만 같다. 청소역에 기차가 다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나름 추측해본다. 기차역 앞의 거리를 활성화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차역이 문을 닫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차가 다니는 것. 이 단순한 사실을 지켜내는 것이 요즘은 참 어렵다.


  청소역에서 한참을 쉬다가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갈매못 성지다. 이번 여행길에 처음부터 갈매못 성지를 방문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우연히 대천에서 갈매못 성지에 대한 안내표지를 본 순간, 꼭 들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나는 길거리에서 기도할 때 쓰는 묵주를 주운 적이 있다. 짙은 고동색의 크고 묵직한 묵주였는데 갈매못 성지라고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아마도 묵주의 주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는 마음으로 구입했을지도 모른다. 주인을 찾지 못한 묵주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내 손에 있다. 묵주의 주인 대신 내가 내 마음속의 염원들을 굵직한 묵주 한알 한알에 간절하게 담는다. 언젠가는 한번 가보리라던 갈매못 성지,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성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갈매못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앙을 지키고자 500여 명의 선조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원이 밝혀진 다섯 분이 천주교 성인품에 올랐다. 사실, 나는 천주교 신자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민망할 만큼 천주교 역사나 교리, 각종 형식에 문외한이다. 천주교 서적보다 다른 책을 접하는 시간이 더 많고, 천주교의 복잡한 절차에 난색을 보일 때도 더러 있는 사이비 신자다.


갈매못 성지에서 바라본 바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왜 이리 더딜까, 나름 고민도 해보지만 느린 걸음이라도 멈추지 않고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는 나름의 핑계를 둘러댄다. 그런데도 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언제나 믿어왔기에 하느님 앞에서 늘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는 권리를 누린 존재이지 않을까.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천주교 성지를 방문한다는 것이 낯선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방문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천주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자 경험이 될 거라고 여겨진다. 갈매못 성지는 전국에서 유일한 바닷가 성지라고 한다. 계단을 따라 성당으로 가는 길, 이곳이 순교지라는 것도 잊게 만들 만큼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기도를 드린다. 이곳 성지에서 나는 순교자들처럼 내 신앙이 점점 커지기를 기도한다. 나를 한없이 편하게 하는 곳, 눈물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곳, 내가 앞으로도 서 있어야 할 곳, 성당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누구나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당 안 의자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잠시만이라도 앉아있기를 추천한다. 성당이 주는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내가 진정한 ‘나’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지 내에 넓은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카페도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카페다. 사찰 내에서 조용히 해야 하듯 성지 내에서도 말소리를 조금 낮추는 게 예의다. 온종일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나는 바로 성물방으로 향한다. 성물방이란 일종의 천주교 선물센터다. 천주교 관련 각종 용품을 파는 곳으로 종교 서적과 책갈피, 묵주반지, 성모상 등 없는 게 없다. 여행자로서 아기자기한 용품들을 구경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다. 내가 지닌 묵주의 주인도 이곳에서 묵주를 구매했을 것이다.


  나는 책 몇 권과 열쇠고리를 산다. 내 마음이 하느님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몸이 매우 아팠다. 감기몸살이 심하게 난 것 같으면서 잠만 몇 시간씩 잤다. 갱년기 증상이 겹친 건가. 요즘은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보며 나름대로 진단을 내리고 스스로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에도 너무 지친다.


  향긋한 커피향에 몸의 통증이 사그라들기를 바라며 라디오를 켠다. 마침 내가 즐겨듣는 프로의 오프닝 멘트가 흘러나온다.

  “수없이 흔들리지만 우리는 다시 중심을 찾아갑니다.”

  이름 모를 작가가 오직 나를 위해 써준 글처럼 느껴진다. 내 몸도 마음도 이렇게 흔들리지만 며칠 지나면 보란 듯이 또 중심을 잡고 우뚝 설 것이란 걸 굳게 믿는다. 묵주기도를 드리는 내 손끝에서 묵주알이 더욱 힘차게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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