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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Oct 01. 2023

몸과 마음이 살며시 열리는 마을

『봉성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이 아니라 애쓰지 않는 감각이다노력의 강박에서 벗어나 단 한 순간이라도 온전한 감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라이것이 우리가 기울여야 할 유일한 노력이다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감각을 혹사해왔다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감각을 총동원해 살아왔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웨인다이어 지음토네이도, 2019, p43.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어온 나에게 심리학자인 저자는 온전히 힘을 빼라고 충고한다. 두 발로 꼿꼿하게 버티고 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라는 듯 작가는 애쓰지 말고 살아보라고 등을 툭툭 두드린다. 온몸의 긴장을 풀고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곳, 아마도 내 삶에서 봉성이라는 고장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한다. 봉화군 봉성면에 위치한 봉성역 일대는 내가 일 년에 서너 번씩은 방문하는 곳이다. 영주와 가깝다는 지리적 근접성도 있지만 마을 자체가 주는 느낌이 평온하고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봉성역이다. 봉성역은 오래전에 문을 닫은 영동선의 무인역이다. 원래는 열차가 지나다니지만 지금은 지난번 폭우로 인해 영동선의 모든 열차가 운행 중지된 상태다. 봉성역에는 사람이 근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 철제로 모든 문을 가리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놨다. 다행히 평일이라 타부서인 시설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어 역사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봉성역은 산을 마주 보며 서 있다. 풍성한 초록 잎을 품은 나무가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행복한 산지기가 된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짙은 분홍의 배롱꽃이 푸르른 산과 조화를 이루며 조용히 피어있다. 영동선 선로 보수작업에 필요한 장비가 늠름하게 철길을 지키고, 열차가 다니는 선로의 보수를 책임지는 시설 직원들은 작업 준비를 하는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영동선의 무인역, 봉성역

  시설 직원들마저 없으면 봉성역이 정말 적막하겠구나,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멀리서 고양이 몇 마리가 보인다. 새끼고양이와 제법 덩치가 큰 고양이 몇 마리가 서로 어울려 놀고 있다. 마침 젊은 직원이 고양이 곁에서 사료를 주길래 물어보니 임신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아 어쩔 수 없이 키우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럼 사료값은 어떻게 하나요?”

  “직원들이 조금씩 내서 사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나는 직원들의 마음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를 자신들의 돈을 조금씩 추렴해서 키우는 그 정성, 동물들과 마음의 거리가 서너 뼘씩이나 되는 나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사무실이 기차역 옆에 있어 동물을 마음 편히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되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자신의 휴식 시간을 잠시나마 고양이에게 내어줄 수 있는 여유와 동물을 사랑하는 심성이 마냥 부럽다.


  몇 년 전 영주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복선화 공사 및 역사(驛舍) 증축 공사로 역 전체가 어수선하던 때였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공사장에 고양이 한 마리가 갇혀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좁은 틈새로 끄집어내려고 하면 더 깊이 들어가 버려 119를 불러야 하나, 동물보호소에 전화를 해야 하나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는데 다행히 직원 한 명이 무사히 고양이를 꺼냈다.


   그 후 주인 없는 고양이를 노조 지부 사무실에서 키우게 되었다. 새끼를 낳자 키워줄 사람이 없어 직원들이 새끼들까지 보살피게 됐고, 사고로 새끼 고양이의 다리가 부러졌을 때는 직원들의 돈을 추렴해 수술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어미 고양이는 죽고 지금 키우는 고양이가 3대째라고 고양이를 아끼는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가보고 사료가 없으면 개인적으로 사다 놓고, 물이 없으면 떠다놓는다고 한다.


  지난겨울에는 지부실 출입문에 ‘고양이 출산으로 출입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붙어있은 적이 있었다. 우연히 안내문을 보던 날,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져 혼자 웃었던 기억이 있다. 봉성역을 나오며 자연과 더불어 근무하는 환경이 사람들에게 여유로움을 주는지도 모른다고 혼자서 생각한다.     


  봉성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봉성초등학교가 있다. 봉성을 여러 번 오가면서도 봉성초등학교는 처음이다. 교문으로 들어서는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초등학교 1학년쯤 됐을까, 모래놀이가 한창이다. 놀이에 빠진 아이들을 지켜보는 선생님이 계시는 거로 보아 방과 후 수업쯤 되나 보다.

  “선생님, 전교생이 몇 명이나 되나요?”

  “16명이에요.”

  16이라는 숫자 속에 아쉬움을 잔뜩 담아 말씀하시는 듯하다.

  “아이들이 좀 더 많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네요.”

  나 역시 선생님과 똑같은 마음이다. 운동장에서 뛰어놀 아이들이 불과 16명밖에 없다는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난다. 나무집, 집라인, 바이킹이라고 이름 붙은 놀이기구들이 아이들을 기다린다. 나무 재질로 만들어져있어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쇠붙이로 만들어진 녹슨 시소나 미끄럼틀에 익숙한 나에게 이곳의 시설들은 자연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봉성초등학교에 조성된 해거름길

  학교 곳곳이 마음에 들지만 특히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이 있는데 바로 ‘해거름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작은 꽃동산이다. 맨드라미, 백일홍을 비롯한 소박한 꽃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있고, 그 주변을 걸을 수 있도록 몇 개의 평평한 디딤돌을 깔아놨다. 불과 몇 걸음 만에 지나올 수 있는 짧은 길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아담한 동산 뒤로 집 몇 채가 보여 운치를 더한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의 어디쯤엔가 나올법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서 있는데 아이의 큰 목소리가 들려온다.

  “교장 선생님, 잠자리 잡아주세요!”

  모래놀이를 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지나가던 선생님을 부른 것이다. 그것도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절대 가까이할 수 없었던 교장 선생님이라지 않은가. 나는 교장 선생님이라고 하면 희끗희끗한 머리에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조회 시간에 오래도록 이야기를 하셔서 학생들 모두를 지루하게 만드셨던 분이기도 했다.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오더라도 긴 훈화가 마치 교장 선생님의 필수 덕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김없이 이어졌다. 이런 내 기억의 단편을 재정리하라는 듯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매우 젊어 보이신다.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듣지도 않을 긴 이야기를 이어나갈 분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이들 곁에 서 있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초등학교에서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교문 밖을 나서는데 택시가 세 대나 와있다. 순간, 학교를 마친 아이들을 태우러 온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러 오지 못해 택시를 보낸 건가, 아니면 기사분의 아이들이 이 학교에 다니는 건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나는 택시 기사분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혹시 학생들 데리러 오신 건가요?”

  “아, 예.”

  “그럼 학생들 부모들이 보내신 건가요?, 아니면 지자체에서?”

  “지자체에서 보조금 나와요.”

  노란 스쿨버스 대신, 택시가 학생들의 등, 하교를 책임지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아, 그렇군요.”

  오지랖 넓은 나는 궁금증을 푼 후에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 밖을 나선다. 등하교 걱정 없는 자연환경 좋은 학교에 아이들이 몇 명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띠띠미 마을로 향한다. 띠띠미 마을은 3월 말에서 4월 중·하순까지 산수유가 활짝 핀다. 마을 전체가 노란 산수유꽃으로 뒤덮여 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두곡(杜谷) 홍유정 선생의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둔하여 자리를 잡은 선생은 ‘산슈유를 잘만 가꾸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벼슬을 하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는 자신의 철학을 이 마을에서 실천했다고 한다. 원래는 두동(洞杜)마을로 표기되었다고 전해지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곳을 ‘띠띠미 마을’로 부르는데 더 익숙하다.

띠띠미 마을의 정자

  벌써 십여 년이 지난 일이다. 이 마을을 처음으로 알게 된 이듬해, 산수유꽃이 절정일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3월 중순에 한번, 3월 말에 한번, 4월 초에 한번, 이렇게 세 번을 방문했다. 나는 그때 띠띠미 마을의 산수유는 다른 곳보다 조금 늦게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특성상 기온이 다른 곳보다 낮아서 그런가보구나, 혼자서 짐작했더랬다.  봉성의 산수유꽃은 4월 초에서 중순까지가 절정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해마다 꽃이 피어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이 마을을 찾았다. 아담한 마을이 은은한 노란빛으로 뒤덮인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산수유 마을에 대한 내 사랑이 깊어만 가던 어느 해이던가, 산수유꽃의 색깔이 다른 해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노란색이 아니라 검붉고 탁한 노란색을 띠는 거였다.


  아무리 봐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꽃의 색깔이 어두워 보였다. 마침 지나가던 어르신이 있어 여쭤보니 산수유 열매를 따지 못해 그대로 두어 색이 달라 보이는 거라고 하셨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나무마다 말라버린 검은 열매가 그대로 달려있었다. 꽃만 피어있어야 멀리서 보아도 노란빛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검붉은 열매가 같이 매달려 있으니 노란색이 어두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을에 산수유를 딸 젊은이들이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날 이후로 예전과 같은 맑고 깨끗한 산수유꽃을 보기는 힘들어졌다. 작은 휴식처를 한순간에 빼앗겨버린 듯 낙담을 했지만 산수유꽃이 나를 부르는 시기가 되면 아쉬운 마음은 접고, 행복하게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곤 한다.


  오늘은 초록의 나뭇잎들이 나를 반긴다. 산수유꽃 대신 둥그렇고 넉넉한 잎사귀가 마을을 장식한다. 얼마 전에 영어 회화 수업을 잠깐 들은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색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 한 분이 초록색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인공적인 초록이 아니라 자연의 초록빛을 사랑한다고. 자연이 주는 초록빛, 정작 영어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우리말 표현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마을 곳곳을 천천히 걷는다. 나뭇잎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꽃이 만발한 때의 띠띠미 마을도 아름답지만 꽃이 져버린 띠띠미 마을 역시 매력적이다. 꽃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푸르른 잎이 전해주는 속삭임과 평온함은 나이가 들어서야 제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해마다 봄이 되면 꽃 잔치를 즐기러 예전보다 많은 사람이 찾는다.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혹시라도 지자체에서 유명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시끌벅적한 먹거리 장터나 길게 늘어선 노점상을 조성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마을 그대로의 고요함과 평온함이 없다면 띠띠미 마을은 이미 띠띠미 마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봉성에는 순두부와 청국장으로 유명한 ‘고향집 식당’과 된장찌개로 유명한 ‘강순화 된장’이 있다. ‘고향집 식당’은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이 휴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각 없이 방문했다가 허탕 치고 돌아온 적이 몇 번 있다. 띠띠미 마을을 산책하고 ‘강순화 된장’이나 ‘고향집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다. 오늘은 청국장이 반쯤 섞인 듯한 된장찌개 맛집, ‘강순애 된장’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냥 있으면 알아서 주니더.”

읍내에 새로생긴 봉성약국

  몇 년 전, 지인과 처음 방문했을 때 벽면 어딘가에 쓰인, 메뉴판 비슷한 걸 보고 순두부 하나, 청국장 하나를 주문했더니 나에게 돌아온 주인장의 대답이었다. 그냥 있으면 알아서 주는 곳, 메뉴는 딱 하나다. 굳이 이름을 정하자면 된장찌개 정식이나 비빔밥이라고 해야 할까, 비빔밥이라고 하기엔 나오는 반찬의 가짓수가 너무 많고, 된장찌개 정식이라고 하기엔 비빔밥이 서운해할 듯하다. 커다란 양푼에 싱싱한 나물이 잔뜩 담겨 나온다. 거기에 참기름을 휘휘 두르고, 작은 단지에 있는 빨간 고추장을 입맛대로 넣어 맛있게 비벼 먹으면 된다. 저렴한 가격은 덤이다.     


 가슴속에 혼자 품고 싶은 띠띠미 마을을 산책하고 큰 양푼에 비빔밥을 쓱쓱 비벼 먹으니 이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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