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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Aug 28. 2023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곳

『의성역』

  얼마 전 고교 동창과 우연히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학창 시절의 여러 날을 서로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터라 적잖이 반가웠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수다를 떨다가 친구가 깔깔거리며 한마디 한다.

  “근데 니가 아직도 직장생활하고 있다고?”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하다, 신기해. 그눔의 돈이 뭔지 나답지 않게 평생을 이러구있네. 인간  정정심이가.”

  내 대답에 친구는 또 까르르 웃는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직장생활에 묶여 살 성격은 아니었다. 조금 이른 나이에 먹고살기 위한 굴레 속에서 허덕여야 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나를 직장에서 버티게 한 유일한 이유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 오랜 시간 이어온 직장생활이 끝날 무렵,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좀 더 변화된 내일, 더욱 발전하는 내 모습을 위해 나는 오늘도 새로운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오늘은 거리는 가깝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의성역을 찾는다. 영주역에서 무궁화호로 4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대구경북본부의 많은 역 중 하나다. 가까운 거리에 비해 의성은 영주 생활권이 아니라 안동 생활권이라 심리적 거리가 먼 역이기도 하다.


아직은 어수선한 의성역 임시역사

  의성역에 도착하니 영주역과 마찬가지로 역사 증축 공사가 한창이다. 근무하는 직원들이 나만큼이나 피곤하겠구나 싶다. 영주역은 역사증축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새 사무실로 이전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다. 요즘은 다른 역으로 발령을 내달라고 얘기하고 싶을 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하다. 직원은 줄일 대로 줄여서 최소인원만으로 근무를 해야 한다. 기존에 하던 일 외에도 역사 이전에 따른 각종 업무가 가중되어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야말로 파김치가 된다. 더러는 공사작업자들과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그럴 때면 정말로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다.


  업무를 수행하면서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는 식의 상급자나 상부기관의 무관심한 태도가 나를 더 힘들게 한다. 기차역의 주된 업무는 고객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기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들의 주된 업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되어야 하듯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직장생활이 고달파진다. 그게 현실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예스! 예스! 해야 하는데 꾹꾹 참고 있던 옳고 그름에 대한 내 나름의 사고의 물줄기가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몇 년만 더 모른 척하고 참고 버티자!’를마음속으로 되뇐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직장생활이란 어느 정도 비굴해지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임시 맞이방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에 걸려있는 시가 눈에 띈다. 임시로 지어진 건물임에도 고객들을 위해 시를 걸어둔 직원들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허전한 벽면을 시가 쓰인 깔끔한 액자로 채우니 한결 풍성하고 정돈된 모양새다.      



                               다가오다 말고 쑥스러워 뒤돌아섰지만

                               하얀 컬러 교복 입은 소녀는 알았다.

                              ‘좋아한다’는 말 간직만 하고 있는

                              질항아리속 같은 소년의 그 마음을.

                              우연히 눈 마주치자 슬며시 고개 돌렸지만

                              검은 교모 눌러 쓴 소년은 보았다.

                              빠알간 얼굴에 가득 피어있던

                              소녀의 수줍은 듯 하얀 그 미소를.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소년

                              할머니가 되어 있을 소녀

                              푸르렀던 학창이 끝나던 그 날

                              헤어질 듯 떠나면서 고스란히 두고 간

                              백합처럼 순수했던 그 추억 찾으러 올까.     


                                                                                    권영호의 「의성역 플랫폼」 중에서     


  교복을 입고 의성에서 안동까지 통학을 하던 싱그러운 학생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때는 의성도 교복 입은 젊은이들의 활기찬 웃음으로 가득 찼던 지역이었겠지만 지금은 노령인구가 유독 많은 농촌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역 건물을 비롯한 모든 복선화 공사가 끝나면 의성역에서도 몇 년 안에 KTX를 탈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 KTX에 비해 느리게 움직이는 무궁화호 열차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의성처럼 쇠락해가는 지역을 살리기 위해 KTX 열차의 운행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찬성이다.


  일부러 의성 장날에 맞춰 이곳을 찾았다. 농촌의 장날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뙤약볕 속에서도 마음만은 가볍다. 한적한 시골장이려니 하고 갔는데 예상외로 시장의 규모가 크다. 유독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이 있어 그곳으로 향한다. 시장에서 유명한 맛집인 건가 싶어 앞쪽을 살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가 아닌가. 그것도 밀떡과 쌀떡을 같이 팔고 있다. 고민할 필요 없이 나는 밀떡과 쌀떡을 1인분씩 주문한다. 남으면 포장해서 집에 가서 먹으면 된다. 집에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둘 다 먹어봐야 한다.


  떡볶이 양념에서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떡볶이의 자태가 한없이 부드러워 보인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입맛이 돈다.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쌀떡과 밀떡의 양념은 같지만 역시나 씹히는 질감이 다르다. 밀떡이 좀 더 가늘어 양념 고유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고, 하나를 먹고 나면 금세 다른 하나를 먹고 싶어지는 마법을 간직하고 있다면 쌀떡은 역시나 굵고 묵직해서 하나를 먹어도 든든한 기분이 들고, 20대의 힘겨웠던 날에 허기와 기분전환을 위해 대구에서 즐겨 먹던 떡볶이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양념이라 둘 다 맛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오늘의 금메달을 밀떡에게 준다. 일상이 주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떡볶이를 포장하여 가방에 넣고 가려는데 튀김 하나가 내 발길을 사로잡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식빵 튀김이다. 식빵 하나를 대각선으로 잘라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 식빵 튀김은 그야말로 튀김계의 지존이라 할만하다. 노릇하게 잘 튀겨낸 식빵에 설탕을 솔솔 뿌려 먹어도 맛있고, 케첩을 뿌려 먹어도 잘 어울린다. 오늘은 떡볶이로 이미 배를 채운 터라 딱 하나만 손에 들고 먹어보기로 한다. 역시 식빵의 부드러움과 튀김옷의 바삭함이 어우러져 독보적인 맛을 선사한다. 식빵 튀김을 베어 물며 시장길을 걸으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의성시장 닭발 골목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먹음직스러운 감주를 파는 가게를 지나고, 오래도록 사람들을 위해 각종 농사기구와 생활 속에서 꼭 필요한 연장을 만들었을 대장간을 지나서 닭발 골목을 만난다. 닭발 전문 식당도 많고 식당 안에는 사람도 많다. 의성과 닭발 골목이라, 언제부터 의성이 닭발로 유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성시장의 인기 음식은 닭발임이 틀림없는 듯 보인다. 포장해가려고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뒤에 서서 나도 차례를 기다린다. 식어도 정말 맛있다는 주인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닭발을 먹기에는 이미 배도 너무 부르고, 소주 없는 닭발을 먹기에는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에 포장해가기로 한 것이다.


  잘 구워낸 닭발을 가방에 넣고 길이 난 쪽을 향해 씩씩하게 걷다 보니 제법 넓은 공간이 보인다. 국숫집과 각종 잡화점, 농기구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사람들이 밖에서 음식을 먹거나 쉴 수 있도록 식탁도 예쁘게 놓아두었다. 누가 보더라도 시장안을 깔끔하게 보수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제법 넓은 공간과 정돈된 거리인데 정작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좀전의 먹거리 골목과는 다르게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진 곳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할머니, 여기는 조용하네요?”

  밖으로 나오는 국수 가게 할머니께 한마디 여쭙는다.

  “사람들이 여는 안오니더.”


  이미 체념한 지 오래라는 듯 무심히 던지는 할머니의 말씀이다. 나 역시 이곳에 와서 떡볶이와 닭발집에서 머물렀을 뿐이다. 옷이나 모자, 다른 생필품을 파는 곳은 그저 구경삼아 지나온 게 전부다. 큰 마트와 인터넷 쇼핑을 통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게 습관이 된 터라 이곳에서 굳이 물건을 사서 들고 다닐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의성시장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똑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지자체에서 매스컴을 동원하고 각종 대안을 내놓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많은 가족이 KTX를 타고 의성 산수유꽃 축제를 찾는 날이 있기를, 젊은이들이 내일로 티켓을 끊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의성 고운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는 날이 있기를, 나와 같은 중년들이 의성역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삼한시대 부족국가였다는 조문국의 자취에서 삶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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