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역』
며칠 전, 남편이 갑작스레 부산으로 교육을 가게 됐다며 마침 내가 쉬는 날이니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집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부산에서 남편이 교육 받을 동안 나에게 주어질 자유시간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마음의 반쪽은 집에서 쉬고 싶다를 외치고 있었고, 또 다른 반쪽에서는 가보지 못한 역을 둘러볼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갈까 말까 고민될 때는? 무조건 간다.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무조건 한다. 내가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여행지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지키고 있는 나만의 개똥철학이라고나 할까. 남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조건 하는 게 나은 법이다. 남편에게 큰소리치며 이른 아침 따라나섰다. 장거리 운전 지루하고 힘들까 봐 내가 가주는 거라고, 가다가 휴게소에서 맛있는 거 사라고.
이런 말에 남편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본다.
“너, 내 출장지 근처에 안 가본 역 가보려고 따라가는 거 다 알아.”
나랑 같이 산 지 25년째, 어느덧 이제는 이 남자가 나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운 좋게도 남편의 출장지 근처에 옛 송정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의 송정역은 지하철이 다니지만 내가 찾은 곳은 예전 동해남부선의 일부였던 송정역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송정역은 1934년 12월에 손님맞이를 시작하였고, 1941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송정해수욕장 뒤쪽에 있는 송정역을 마주하자 마음속에 환한 전등이 켜지는 것처럼 흐뭇하고 설렌다. 지금은 철도노선도에서 사라진 역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단정하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에 작고 아담한 역사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서니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지 않은가. 해운대 블루라인파크 송정정거장. 옛 송정역의 정식 명칭이다.
해운대 블루라인파크는 해운대 미포에서 청사포, 송정에 이르는 4.8km 구간의 동해남부선 옛 철도시설물을 친환경적으로 재개발한 관광시설이다. 해안열차는 물론 스카이캡슐이라는 공중열차를 타며 뛰어난 바다 경치를 음미해볼 수 있다. 나는 송정역이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해변열차로 송정에서 미포 승강장까지 가는 1회 탑승권을 끊고 약간의 여유시간이 있어 송정역 주변을 둘러본다.
참 아기자기한 동네다. 송정역에서 송정해수욕장 사이에 송정역만큼이나 작고 예쁜 상점들이 보인다. 그중 한곳에 유독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나도 고개를 내밀어보니 10원빵과 500원빵을 파는 곳이다. 젊은 주인에게 물으니 체인점이란다.
“10원빵과 500원빵의 차이점이 뭐가 있나요?”
빵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며 물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10원 빵에는 치즈만 들어가고, 500원빵에는 피자콘이 추가됩니다”
안에 들어가는 소가 달라진다고 하니 주문을 하면서 잠시 고민을 하게 된다.
“10원빵 하나 주세요!”
나는 큰소리로 10원빵을 외친다. 마치 돈의 유혹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제법 괜찮은 지성인이 된 것처럼 당당하게!
치즈가 듬뿍 들어간, 갓 구운 10원빵에 푹 빠져들며 송정해수욕장으로 걸어가는데 외국인 가족이 반대쪽에서 걸어온다. 내가 치즈를 늘어뜨리며 먹는 모습이 재밌었는지 젊은 엄마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Hi”
이때다 싶어 얼른 인사를 건넨다.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외국인만 보면 무슨 말이든 하려고 노력한다.
“Hi”
환하게 웃던 긴 머리의 여성이 대답한다. 간단한 인사지만 외국인이나 영어에 대한 부담감 없이 주고받을 수 있어서 뿌듯하고 행복하다. 얼마 전 유명 강사 김미경 씨가 외국의 한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김미경 씨도 나처럼 영어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 더 나이 들기 전에 영어를 익히기로 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 외국 여행하며 가이드의 깃발만 보고 쫓아다니는 패키지여행보다 언어를 익혀 자유여행을 가면 얼마나 멋있겠냐고도 했다.
내 마음이 딱 그랬다. 나이 들어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영어 회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유여행을 좀 더 알차게 하기위한 필수요소중 하나가 언어라고 느꼈다. 김미경 씨의 외국대학 강의 도전 영상을 보며 참 대단하구나, 라는 부러움과 함께 나도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면 외국 여행에 필요한 영어 정도는 막힘없이 해낼 수 있겠구나, 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아무리 번역앱이 잘 나와 있어도 사람과 사람이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도가 뒤로 나가는듯한 나의 영어 회화 실력에도 모터가 세차게 가동하는 느낌을 받으며 질주하는 때가 오겠지!
해변열차는 마치 셔틀열차처럼 운행되고 있었다. 한 시간에 2~3대씩이나 운행되고 있어서 교통수단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전 구간이 관광명소인 터라 코스마다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린다. 남편과 만나기로 한 시간약속만 아니라면 ‘모든 역 탑승권’을 끊어서 전 코스의 경관을 찬찬히 음미해보고 싶을 정도다. 아쉽게도 오늘은 열차 안에서 해변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열차 안에는 외국인도 많았다. 2022년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어 더욱 유명해진 듯하다. 해변열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마치 어린 시절, 만화나 동화 속에서 보던 동네처럼 따스하고 아름답다. 외국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카페도 많이 보인다. 최고의 관광상품이면서 폐역(廢驛)과 폐선(廢線)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바다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빛난다. 거기에 바다와 어우러지는 아기자기한 건물과 여행자의 부푼 마음을 싣고 달리는 기차가 만났으니 환상의 콤비를 이룬 셈이다.
이 해변열차는 꼭 다시 타러 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의 종착지인 미포승강장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옥수수 반쪽으로 배를 채운 듯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오니 세차게 비가 온다. 부산에 도착해서부터 비가 내리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그야말로 폭우다. 살면서 이런 폭우는 처음 본다. 하늘에 큰 구멍이 뚫려 내가 서 있는 자리에만 비가 집중적으로 퍼붓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남편과의 약속 시간은 가까워져 오는데 휴대전화로 택시를 몇 번이고 호출해도 응답이 없다. 30분이 지나서 겨우 택시 한 대를 탔다. 신발이랑 옷은 다 젖은 지 오래다.
“오늘 같은 날은 집에 일찍 들어가서 부추전에 막걸리 한잔하는 게 딱입니더. 오늘 같은 날은 택시 못 잡십니더. 손님은 운이 좋았습니더. 우리 집이 마침 벡스코 근처라서 내가 집 가는 길에 콜 받았심니더.”
안 그래도 택시 못 잡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정말 은인처럼 반가웠다. 기사분이 지난번에도 비가 많이 내려 백화점 앞 도로가 잠겼었다고 얘기하는 도중, 기사분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온다. 운전 중이라 스피커폰을 하셔서 통화 내용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오야, 내 지금 집에 갈라칸다.”
“안된다. 지금 집에 오면 절대 안 된다. 여 다 물에 잠겼다. 지금 절대 집에 오면 안 된다. 내 상황 보고 전화할 테니까 어디 식당 들어가서 밥 먹고 있어라. 차도 다 잠기고 걸어서 도 몬들어온다. 알겠제?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 사고 난다. 내 말 알겠제?”
다급한 목소리에 현장 상황이 어떤지 실감이 난다. 점점 굵어지고 빨라지는 빗줄기를 가녀린 윈도브러시가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예상했던 대로 물이 무릎까지 찬다. 경찰이 도로를 통제하고, 주차해 있던 차량은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사방에서 하수구 냄새가 진동을 한다. 거리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행인들이 발만 동동 구르며 서 있다. 눈 깜짝할 새에 재해 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 펼쳐진다.
송정역과 해변열차가 로맨틱 코미디처럼 감미로웠다면 난생처음 보는 무서운 빗줄기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시나리오였다. 물탱크 수십 대로 한꺼번에 쏟아붓는 듯한 비를 보며 비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 자연이 크게 포효하는듯한 요동을 바라보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림 뿐이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해 TV를 켰다. 다행히 부산에 비로 인한 인명피해가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