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역』
익명으로 운영되는 회사 게시판에 후배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 종종 글을 올리곤 한다. 나이 많은 선배들과의 갈등, 체육행사와 회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 동료들과의 마찰에서부터 회사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까지. 갈등이 심할 경우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신입사원 때 했던 똑같은 고민을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처럼 이어가고 있는 걸 보면 조직 생활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게 분명한가 보다.
25년간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나이지만 여전히 조직 생활 부적응자다. 신입사원 때보다 좀 나아진 게 있다면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능력이 좀 더 생겼다고나 할까. 요즘에는 일하면서 대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보편적 사실이 상급자 개인의 견해에 의해 무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 직장인들의 영원한 진리, 그냥 시키는 대로 해,를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껏 하라는 대로 하면서 월급을 받아왔건만 근무 해온 날보다 근무해야 할 날들이 훨씬 적게 남은 지금, 아니오,라는 반기를 들고 싶은 건 아마도 이제껏 다져온 내 삶의 가치관과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기차를 타라고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느낌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기차와 기차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차에 올라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확인해보아야 할 때다.
오늘도 나는 이미 오래전 자신의 소임을 다한 역을 찾아 떠난다. 김천의 터줏대감 직지사역이다. 영주에서 김천으로 가는 오전 5시 50분, 제1802 열차에 오른다.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하루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 기분, 역시 내가 나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아흔을 훌쩍 넘긴 노부인의 모습을 상상하며 찾아갔는데 내 눈앞에 보이는 직지사역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외벽은 연꽃 그림으로 단장을 해서 이곳이 사찰의 관문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2012년부터 무인역이 됐다고 하는데 지금도 사람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 것처럼 정돈되고 살아있다는 인상을 준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 전시물들을 살핀다. 열차 안 기관사실에 놓여있던 각종 기계가 늠름하게 서 있다.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모자도 준비되어 있다.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곳이다. 벽면에 직지사역의 이모저모를 기록해 놓은 커다란 게시판도 보인다. 게시판에 따르면 이곳 직지사역에서 직지사까지 무려 3km나 된다고 한다. 사찰 이름을 따서 역명을 지은 만큼 직지사역에서 내리면 바로 직지사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도보로 이동하기에는 좀 먼 거리다. 그래도 예전에는 모든 이들이 걸어서 이동했다고 마을에 오래 사셨던 할머니 한 분이 이야기해주신다.
맞이방을 둘러보고 승강장 쪽으로 나오니 ‘김천 시니어클럽’ 문구가 보인다. 시니어클럽? 내가 아는 그 시니어클럽인가? 노인 일자리 사업을 담당하는 그곳이 기차역에?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역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실에서 바삐 걸어 나오는 직원이 보인다.
“여기가 노인 일자리 사업하는 그 시니어 클럽인가요?”
“예, 맞아요.”
젊은 직원이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아, 그렇구나. 폐역에 시니어클럽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처음 봐서요.”
사무실 옆에 가지런히 놓인 수많은 장독대에 이름표가 붙어있다. 마치 내가 담근 장맛이 최고라고 소리라도 치듯. 시니어클럽 소속 할머니들이 직접 담그신 장이라고 한다. 장단지가 많은 걸 보니 상업화하여 대중에게 판매를 하고 있나 보다. 평생 장을 담그며 사셨을 테니 어쩌면 할머니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시니어클럽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영주역에도 지자체에서 의뢰한 시니어클럽 소속 노인분들이 많다. 오전에 잠깐 나와 역 앞에 쓰레기를 줍는 듯 마는 듯하고 매달 일정 정도의 보수를 받는 줄 안다. 그분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해주는 것이 나의 일과 중 하나다. 고령인 분들이 많아 특별히 일을 시킨다는 의미보다는 그냥 돈을 줄 수 없으니 나와서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채우면 월급을 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곳에 와서야 시니어클럽도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가에 따라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고령자라고 무작정 돈을 주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면서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훨씬 득이 되지 않을까. 노인들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도록 프로그램을 짜고 운영을 해 나가는 것이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 앞에 있는 ‘옛길 유통’, 커피를 판다고 하는데 옛길 유통이라……. 간판에서 뭔가 복고적인 느낌이 난다. 그냥 지나치려다 커피숍과는 어울리지 않는 옛길 유통이라는 상호에 이끌려 문을 연다. 이름만큼이나 고풍스러운 자개 식탁이 나를 맞는다. 오래전 부잣집에 놓였을 법한 검은색 바탕에 흰색 봉황무늬를 박아넣은 식탁이다. 자개 식탁에 걸맞은 키 작은 자개장도 보인다.
“어서 오세요.”
주인장과 손님인 듯 보이는 두 분이 내가 월드 스타라도 되는 듯 반갑게 맞는다. 모두에게서 인생의 연륜이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여기도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건가요?”
“예, 맞아요. 우리도 시니어클럽 소속이에요. 이제는 전부 다 늙어서 할머니, 할아버지에요.”
그 말씀을 하곤 호탕하게 웃으신다. 늙었다는 말조차 이렇게 경쾌하게 들릴 수 있을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자개 식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된 자개 식탁이 놓인 커피숍은 아마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이 손님 커피값은 내가 냅니다.”
점잖게 보이던 할아버지가 내 커피값까지 계산하신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처음 뵙는 어르신에게 커피를 얻어먹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손사래까지 쳐가며 극구 사양한다.
“김천을 방문해 준 기념으로 사주는 거니까 괜찮아요.”
김천 방문 기념 커피라. 얼떨결에 공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게 됐다. 커피 맛도 좋고,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내 마음은 꽃밭이다.
옛길 유통, 커피와 음료를 파는 곳이지만 상업적 목적보다는 어르신들의 사랑방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참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공간을 마주하니 상상 속의 공간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진 것 같다. 미래의 나도 이런 곳을 방문하는 손님에게 커피 한잔을 대접할 마음의 여유가 있으려나.
조용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니 복잡했던 머릿속도 덩달아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직장에서의 문제를 내 방식대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용기가 생긴다. 일단 부딪쳐보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도 안 되면? 일단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다. 오랜만에 ‘나’다운 결정을 한 것 같아 내심 스스로가 기특하기까지 하다.
직지사역은 한마디로 어르신들의 성지다. BTS가 가는 곳만 성지는 아니다. 마음 편히 모여앉아 인생을, 노년의 생활을, 가끔씩 찾아드는 마음의 우울과 일상의 기쁨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성지가 아닐까.
집으로 돌아와 영주시니어클럽을 검색했다. 영주에도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소담 카페와 은빛 유통이라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내가 매일 지나다니는 길목에 영주시니어클럽 사무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쁘게 지나치기만 했지, 관심 있게 보지 않아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보처럼 또다시 같은 깨달음을 반복한다. 일상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잠시라도 내가 머물던 자리를 떠나면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