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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Apr 10. 2023

내 인생의 봄날 같은 역

『경화역』

 진해역에서 군항제 안내를 맡은 분들께 경화역으로 가는 방향을 물으니 버스나 택시를 타라고 권한다. 걸어서 가기에는 먼 거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약 3km. 봄 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걷기로 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벚꽃이 보인다. 전 아나운서 손미나 씨의 책 제목처럼 정말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이다.


  큰 도로 양쪽으로 유독 요양병원이 많이 보인다. 고령화는 우리 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자 앞으로 펼쳐질 내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늘 죽음이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며 살아왔다. 일부러 생각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내 삶이 그랬다. 내 나이 일곱 살에 다섯 살 된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고, 열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했다.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두고는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사연이 깊다.


  어떤 지인은 죽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하냐고, 나이 들어 그냥 죽으면 되는 거지, 라고 얘기하지만 나는 그처럼 어리석은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멈추어 서야 하는 삶의 종착역이다. 무엇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나 살아가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워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아도 노년에 자다가 조용히 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갈림길이 보인다. 다행히 교통정리를 하는 분이 보인다. 아마 군항제를 위해 고생하는 분인가 보다. 경화역을 가려면 길을 건너라고 한다.

  “감사합니다!”

  큰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길 안내를 하던 아저씨가 멀리서 고개를 끄덕한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순간이다.


  경화역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돌아보니 외국인이다. 경화역을 가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다. 올해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있다. 그 덕분인지 외국인과의 만남이 반갑다. 여성은 벚꽃이 만발한 기차역의 사진을 보여준다. 경화역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열차 사진이다. 사진을 가리키며 이곳이 경화역이 맞냐고 묻는 여성에게 “예스! 아이 고우 데얼, 투!”라고 당당하게 말하자 깜짝 놀라면서 반가워한다.


  어쨌거나 둘이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경화역까지 같이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목적지까지 30분 정도 남았다고 하니 자신은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한다. 걸어서 30분인데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가.

  “아이 원투 투 워크 데얼.”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따로 경화역까지 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인도네시아에서 왔다는데 그 나라도 영어를 사용하나, 영어 회화를 연습할 시간을 놓쳐버린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경화역으로 빠른 걸음을 걸으며 버스가 약 30분에 한 대씩 올 거라는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영어로 뭐라고 말했어야 했나? ‘더 버스 컴 투 히어 에브리 써리 미닛츠?’, ‘더 버스 컴즈’가 맞겠구나. 아마 내가 에브리 써리 미닛츠만 말해도 그녀는 척척 알아들었을 텐데. 그래도 경화역까지는 찾아오겠지. 인도네시아에서 경남 진해까지도 왔는데 설마 진해에서 경화역을 못 찾아오려고!


경화역의 철길

  경화역.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벚꽃이 아니라 발아래 깔린 선로다. 폐역이 된 지 오래인데도 선로를 걷어내지 않고 그대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전국 어디에서든 벚꽃을 볼 수 있지만 이곳의 벚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사는 영주에도 며칠만 있으면 강변에 화려한 벚꽃 잔치가 펼쳐질 것이다. 강둑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벚나무가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면 누구나 한 번쯤은 꽃비를 맞으며 걷고 싶어 진다.


  경화역의 벚꽃이 영주의 벚꽃보다 유명한 이유는 바로 걷어내지 않은 철길 때문이 아닐까.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여유, 거기에 나를 영접하는 근위병처럼 양쪽으로 펼쳐진 벚꽃이 있기에 남다르다. 벚꽃 때문에 철길이 돋보이는 건지 철길 때문에 벚꽃이 더 빛나 보이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젊은 날의 행복했던 한때가 이곳, 경화역에 머무르는 듯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젊은 남녀들은 철길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앞모습을 찍기도 하지만 둘이서 함께 걷는 뒷모습을 많이 찍는다. 양팔을 벌리고 비틀거리며 철길을 걷는 그들의 모습이 핑크빛의 벚꽃과 어우러진다. 세상의 모든 생동감과 활력이 경화역으로 모여든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구두를 신고 자갈이 있는 철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자갈 위를 걷는 것은 발목을 삐끗할 수도 있고 미끄러질 우려 또한 많다. 직원들도 업무상 선로에 들어갈 때면 자갈을 밟기보다는 선로 위의 쇠 부분을 디딘다. 내부 규정상 일반 운동화를 신고는 절대 선로를 걸으면 안 되고 반드시 특수 제작된 안전화를 신어야 한다.


  고령의 할머니 한 분이 손자, 손녀인 듯 보이는 젊은이들과 선로 위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인다. 할머니의 예쁜 모습을 찍기 위해 손녀가 좀 더 왼쪽으로 걸어오라고 요구를 한다. 할머니가 비틀거리며 자갈을 딛는데 순간 내 가슴도 덜컹하며 비틀거린다. 젊은 사람들도 힘겨운 자갈길을 여든이 훌쩍 넘어보이는 분이 걷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경화역은 폐역임에도 다른 어느 곳보다 철길이 제법 길다. 그만큼 걸을 수 있는 자갈길이 길다는 뜻이고 낭만적인 요소도 많은 만큼 사고도 있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경화역 안전 수칙   

  

  하나, 경화역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운동화를 신어주세요.

  둘, 경화역에서 걸을 때는 자갈이 아닌, 철길을 딛으며 걸어주세요.

  셋, 경화역에서는 아무리 기분이 날아갈 듯해도 절대로 뛰지 마세요.

  넷, 경화역에 벚꽃이 필 때면 너무 매혹적이어서 심장박동이 빨라질 수 있으니 옆 사람의 손을 꼭 잡고 마음    을 진정시키세요.     


  나름의 안전 수칙을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곳에 음악이 빠질 수야 없겠지. 두리번거리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까지 찾아간다. 바이올린과 베이스와 통기타로 이루어진 퓨전 그룹처럼 보인다. 파헬벨의 캐논변주곡이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나다. 나름 음악을 듣는 귀가 발달해있다고 자부하는데 길거리에서 듣는 캐논변주곡의 수준이 상당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끝까지 듣는다. 연주자들 앞에 놓인 바구니에 큰 글씨로 부산은행 계좌번호가 쓰여있다. 음악도 수준급이고 거리공연 관람료를 자동이체로 하라는 그들의 재치가 돋보여 나름 통 큰 기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진찍기 좋은 경화역 모형

  경화역에서는 차가운 철길과 묵묵히 서 있는 기차마저도 벚꽃의 일부분인 것처럼 여겨졌다. 비록 폐역이더라도 기차역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던 나에겐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옛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경화역이라고나 할까. 벚꽃이 없으면 경화역도 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아침에 기차를 타며 느꼈던 멀미 때문에 하루가 꼬이는 건 아닌가 은근 걱정했는데 경화역에서 나는 행복의 울렁거림을 느끼며 봄 햇살을 받는다. 그나저나 아까 만난 외국인 친구는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오긴 온 건가. 사람이 많아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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