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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Apr 10. 2023

반가운 봄을 찾아 나서다

『진해역』

  어느덧 나에게도 제2의 사춘기가 찾아왔다. 갱년기라는 문을 자연스럽게 지나가지 못하고 몸과 마음에 심한 진통을 겪는 중이다. 어찌나 나를 괴롭히는지 병원 진료를 받느라 한동안 여행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가는 사람도 많다는데 유별나게 이 시기를 맞이하는 것 같아 한동안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갱년기의 이런저런 증상들이 내 성격의 단점을 보란 듯이 말해주는 것 같아 더 서럽기도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육체적, 정신적 증상들이 계속될수록 나만의 갱년기 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별난 갱년기를 겪는 덕에 그것을 소재로 글을 써서 책으로 엮으면 어떨까,라고 자주 생각하곤 했다. 역을 둘러보지 못했던 기간에 다른 글이라도 써서 위로를 받았으니 역시 인생은 장기적으로 더하기와 빼기를 하다 보면 늘 쌤쌤임에 틀림없다.


  작년 이맘때 마당에 심어놓은 달맞이꽃과 할미꽃, 무스카리 등이 얼었던 땅을 뚫고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봄 햇살이 우리 집 마당을 비추니 한동안 겨울잠을 자던 내 생활도 서서히 꿈틀거리는 듯하다. 어딘가로 다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멀리 떠났던 의욕과 열정이 내 곁으로 돌아온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이 반가워 눈물이 났다. 언제 또 변덕을 부릴지 모르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벚꽃의 도시, 진해로 떠난다. 벚꽃이 한창일 때 진해역과 경화역을 방문하고 싶다는 나의 아주 오래된 소망이 이제야 이루어지는 셈이다.


  기차를 타고 진해역으로 가려면 영주에서 대전을 거쳐 마산으로 가야 한다. 지금은 여객열차가 다니지 않는 진해역이다. 영주에서 동대구로 가서 마산까지 가는 방법이 가장 좋겠지만 아쉽게도 열차도 없고 환승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맞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상행을 타고 가서 다시 내려오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괜찮다. 모든 게 다 괜찮다. 떠나기만 하면 괜찮다. 나에게 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가 다시 돌아왔으니 모든 것들이 다 괜찮다.


  영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오전 6시 35분 무궁화호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한다. 캐리어를 끌며 종종걸음으로 걷는 청춘들, 교복 차림에 배낭을 둘러맨 어린 학생들, 먼 길 떠나는 듯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 모두가 바쁘게 움직인다. 생동감 있는 사람들 속에 내가 서 있다. 봄날의 아침 풍경이 주는 생명력과 행복감을 마음껏 들이키며 열차 안으로 들어선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는 다르게 열차 안은 역한 냄새로 가득 찼다. 기차 안에서 멀미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청소는 잘 되어 있다. 의자에서 냄새가 나는 건가, 코를 킁킁거려 본다. 무궁화호 객차는 몇 년 안에 예전의 비둘기호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무궁화호에 투자를 한다는 건 무모한 짓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깨끗하고 쾌적한 객실 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멀미를 생각나게 했던 객실이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흐르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환기를 시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코가 냄새에 적응이 된 탓일까.


    세상이 기지개를 켜는 듯한 창밖의 풍경에 빠져든다. 얼마쯤이나 왔을까.

  “어, 그래. 잘 지내지? 그럼, 아빠도 잘 있지. 아빠 지금 기차 타고 친구네 가는 중이야.”

  “아빠, 건강하시구요. 또 전화 드릴게요!”

  느닷없는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스피커폰이다. 사적인 대화를 모든 이에게 들려주는 이유가 뭘까, 자못 궁금하다. 어느덧 통화가 끝나고 맨 앞 좌석의 주인공이 내 궁금증을 풀어준다.

  “아들들은 용돈 달라고 할 때나 전화하는데 우리 딸은 이렇게 수시로 전화해요.”


  열차에 탄 모든 이들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아저씨. 그런 아저씨의 말에 누구도 대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기차 안에서 스피커폰까지 켜서 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용감한 아버지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열차 안 곳곳에서 들려오는 휴대전화 통화 목소리, 마치 휴대전화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건가, 왜 그렇게 목소리 톤을 높이는지 모르겠다. 휴대전화를 통해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열차 안에 있는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욕구는 아닐까. 열차 안에서 통화 시 과태료를 부과하는 제도가 생기기를 바라야 하나. 기차를 탈 때마다 느끼는 우리의 휴대전화 통화 예절, 변화가 찾아오는 날이 있겠지.


  대전역에서 내려 마산행 KTX에 오른다. 자리에 앉고서야 내 승차권이 역방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도 창 측 역방향. 내가 매표담당 직원에게 부탁하지 않고 매표실 단말기에서 직접 끊은 승차권이다. KTX를 탈 때는 보통 돈을 더 주고라도 특실을 이용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아껴본다고 일반실을 끊었다. 일반실은 의자와 의자 사이의 간격이 좁아 창 측을 이용하면 답답함을 느끼는 터라 통로 측 좌석을 선호하는 나다. 게다가 열차가 가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인 역방향을 끊다니. 좌석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은 내 탓이다.


  무궁화호는 냄새 때문에 속이 안 좋았는데 KTX는 역방향으로 앉아가니 역시나 속이 울렁거리면서 다시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역방향에 앉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아무래도 나랑은 안 맞나 보다. 내가 직접 끊은 승차권인데 누구를 탓하랴. 나도 예전에는 매표업무를 꽤 잘했었는데 새삼 그 업무에서 손을 놓은 지 한참 됐다는 생각이 스친다. 인생에서는 갱년기요, 직장에서는 일할 날보다 일해온 날들이 더 많은 오래된 중고차다. 창밖을 통해 보이는 먼 산의 초록빛을 바라보며 아직은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미래를 꿈꾸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마산역에 내려 버스를 타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앞서가던 두 사람이 어딘가를 향해 마구 뛴다. 아마 그들도 버스를 탈거라는 예감이 들어 나도 그들을 따라 뛰었다. 같이 뛰길 참 잘했다. 내가 몸은 많이 무뎌도 눈치 하나는 끝내준다. 버스가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고 몇 사람이 더 탄 후, 버스 안은 더는 앉을자리가 없었다. 다음 차 타세요. 버스 기사님의 목소리다. 역시 진해 군항제 기간답다.


   옛 영화를 말해주는 듯 진해역 주변은 상가와 시장이 발달해 있다. 비록 지금은 열차를 타고 오지 못하는 진해역이지만 도시 중심부에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역을 보니 반갑다. 굳게 닫힌 진해역은 그저 자신이 품고 있던 광장을 군항제를 위해 말없이 내주고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준비된 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코로나 사태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군항제라고 한다. 버스와 사람과 천막으로 광장은 붐볐지만 기차가 다니지 않는 진해역은 퇴직한 선배의 뒷모습처럼 안쓰럽다.

군항제를 위해 광장을 내준 진해역 

  예전에는 군항제가 시작되면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열차로 진해역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들었다. 진해역에 기차를 유치할 곳이 없어 인근의 다른 역에서 기차를 멈춰야 할 경우도 빈번했다고 한다. 진해 벚꽃 관광열차는 현수막만 내걸면 순식간에 좌석이 매진되는 철도의 효자상품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진해 벚꽃 열차를 운행한다는 소식이 들리긴 하지만 아쉽게도 진해역까지 운행하는 기차는 아니다.


  진해역과 오랜 세월을 같이 했을 벚꽃 나무 주위에서 많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여행사 배지를 달고 노란색의 옷을 맞춰 입은 어르신들이 눈길을 끈다. 할머니들이 버스 타고 한 바퀴 돌며 꽃구경 잘했다고 하신다. 나더러 버스를 타고 둘러보기를 권하시지만 나는 올 때부터 다음 목적지인 경화역까지 걸어서 가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어르신들처럼 버스를 타며 벚꽃을 즐기게 될 것이다. 담소를 나누며 활짝 웃는 그들의 모습이 노란 병아리처럼 예쁘다.


진해역을 지키는 비둘기의 한가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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