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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Sep 28. 2022

백 년의 세월을 찾아서

『불국사역』

  풍기역은 복선화 공사가 한창이다. 역과 역 사이에 선로가 하나이던 것을 상선과 하선으로 나누어 신속한 열차 운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선로를 깔고, 신호기를 다시 설치하고, 신호를 조작할 수 있는 제반 시설을 갖추는 작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러 분야의 사람이 힘을 합쳐 공사를 하며 역에서는 새로 설치된 각종 기계의 위치와 조작 방법을 익히고, 정상 작동 여부를 수시로 점검하여야 한다.


  공사가 진척되면서 미적분의 기본 원리를 모른 채 공식에만 의존해 문제를 푸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식으로 수학 문제에 접근하다 보면 응용문제는 전혀 손도 못 대는 것처럼 처음 마주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닥치면 헤매기 일쑤다. 규정도 찾아보고 담당 부서 사람에게 묻기도 하며 나름 노력한다고 하지만 역부족일 때가 많다. 얕은 나의 지식과 경험을 탓하며 스트레스만 잔뜩 쌓는다.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차에 몸을 싣는 게 아닐까. 올 12월이면 문을 닫는다기에 부랴부랴 불국사역으로 향한다. 무궁화호를 타고 불국사역으로 가는 길, 열차 안에서 바라본 하늘은 드높고 푸르다. 기차가 불국사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짧은 일탈에 대한 기대로 내 마음도 맑은 가을 하늘을 닮아간다.


  기차에서 내리니 ‘불국사역, 100년 역사, 철도 문화재 역’이라는 코레일 표지판이 보인다. 역과 세월을 같이했을 나무들을 지나자 한국의 전통적 건축 형태, 특히 신라의 건축양식을 표현했다는 역사(驛舍)가 조용히 모습을 나타낸다. 기와지붕 때문인지 불국사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많이 봤던 목조건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소임을 다해가는 불국사역의 모습

  “와이래 딱따거리노! 전에 있던 사람은 얼마나 친절했는데! 밑천이 짧은 사람이 딱따거리지 능숙하고 잘하는 사람은 친절하다. 그 사람 와 가버렸노!” 

  불국사역의 중후한 외관과는 달리 역사(驛舍) 안은 양은솥에 물 끓듯 소란스럽다. 할머니는 대화 상대도 없는데 혼자 맞이방에서 목소리를 높이신다. 오지랖 넓은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할머니께 사건의 경위를 듣는다. 이 역 저 역 묻다가 표를 끊으실 때는 질문했던 역이 아니라 다른 역을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러던 과정에서 시간이 좀 흘렀고 표를 끊던 직원은 승차권을 살 때는 처음부터 가실 역을 말씀하시라고 했던 모양이다.


  철도 생활 20년 경력으로 두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르신들은 직원과 긴 대화를 이어가길 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표를 끊는데 필요한 정보는 목적지와 할인 여부, 결제 방법, 이렇게 딱 세 가지다. 1분도 안 되어 승차권을 구매할 수 있는데 연세 드신 분들은 본인의 목적지와는 상관없는 역에 대해 많은 것을 묻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타지도 않는 열차 시간을 알려달라고 하기도 한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고객은 미처 생각 못 하시고 사적인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경우도 많다.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게 친절의 기본일 수 있지만 표를 끊는 곳에서는 긴 대화가 아니라 짧고 신속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게 직원으로서의 솔직한 마음이다. 불국사처럼 작은 역에는 매표담당자가 따로 없다. 대부분 로컬관제원이라 불리는 직원이 매표업무를 병행한다. 로컬관제원은 열차가 오고 가는 상황을 조작판이라 불리는 기계적 장치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일을 맡는다.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에는 자리를 비우지 않아야 하는데 표를 끊는 손님이 오면 어쩔 수 없이 매표 단말기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표를 끊다가 기관사가 무전기로 역을 부르는 경우도 많아 부리나케 달려가 무선 교신을 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부적으로 인력 효율화라는 명목 아래 역에 근무하는 직원의 수가 많이 줄어든 탓이다. 이런 상황을 고객이 알 리가 없다.


  “12월까지만 기차가 다닌다카더니 지가 갈 데가 없어서 그런갑따!”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쓴소리를 하신다. 많이 언짢으셨나 보다. 매표창구에서 일하며 고객에게 만족을 준다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서비스업에 종사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 배려하는 마음이 녹아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업무가 바로 표를 파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작별 인사를 한 후 역사 내부를 살핀다. 벽면에 한국철도의 굵직한 역사가 사진과 함께 붙어있다. 1967년 증기기관차 종운식(終運式), 마지막 증기기관차를 운행했던 기관사 선배님이 아쉬움을 가득 안은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서 있다. 구 서울역사 신축, 승차권 전산 발매 개시. 다양한 사진들과 함께 불국사역 역사도 기록되어있다. 1918년 영업개시, 1936년 현 역사 준공, 2018년 영업개시 100주년……. 조금 전에 만난 할머니의 연세보다 더 오래된 불국사역이다. 불국사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리는 것은 올 12월까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복선전철화에 따른 선로 이설로 불국사역은 역사(驛舍)만 보존될 계획인 듯하다.


  역 광장으로 나오니 공중전화 부스가 홀로 서 있다. 문득 전화가 걸고 싶어진다.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한 친구가 있다. 풍기역 앞에도 공중전화가 있지만 한 번도 수화기를 들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잠시나마 일상에서 멀어졌다고 여유가 생기나 보다. 동전을 넣는 전화기의 상태도 괜찮아 보인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내가 살아온 세월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라 믿었는데 어느 순간 오해가 쌓여 서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15도 각도의 오해는 날이 갈수록 45도, 90도로 벌어져만 갔고 헝클어진 마음을 풀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전화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린다. 아직은 용기도 없거니와 시간의 흐름에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다시 만나야 할 친구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주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기차여행을 하게 되는 어느 날, 오늘처럼 공중전화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친구의 번호를 누르리라고 나 자신과 약속한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 예전 같으면 기차 안에서 과자라도 먹으며 왔을 텐데 지금은 모든 음식물 섭취가 금지다. 둘러보니 불국사역 근처에는 유난히 국숫집이 많다. 잔치국수에서 밀면에 칼국수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사찰음식 중에 국수가 유명하다거나 스님들이 국수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사찰 주변을 중심으로 국숫집이 성황을 이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관계가 있는 건가, 고개를 갸우뚱해보지만 특별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집에 들어가 잔치국수를 주문한다. 평소에 먹던 잔치국수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 보인다. 맛도 보통의 잔치국수와 다를 바 없겠다 싶었는데 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멸치육수와 어우러진 쫄깃한 면발이 모든 감각을 깨운다. 평범한 국수가 이렇게 차별화된 맛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옆 테이블을 살짝 곁눈질하니 비빔국수와 구운 고기, 거기에 만두까지 푸짐하게 먹고 있다. 고기와 만두도 이 집의 대표 음식인가 보다. 혼자라서 많은 음식을 맛보지 못하는 게 아쉽다. 어느새 국물까지 싹 비웠다. 국수 한 그릇에 행복함을 느끼며 서둘러 불국사로 향한다.


  불국사 입구에 들어서니 단풍 잔치가 한창이다. 여러 번 와본 불국사인데 마치 처음인 듯 감탄사가 절로 난다. 단풍 때문일까, 오늘처럼 수려한 경치는 처음이다. 불국사를 닮아 단풍마저도 고풍스럽다.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 나에게 삶의 충만함을 선사한다. 역시 오늘도 여행길에 오르길 참 잘했다. 떠나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숲에 푹 빠져 불국사를 둘러본다.


저마다의 소원을 간직한 등이 불국사를 가득 메운다

  단풍만큼이나 고운 분홍, 빨강, 파랑의 연등이 넓은 뜰에서 나를 반긴다. 가족 건강, 학업성취, 사업번창, 무병장수……. 전국 각지에서 방문한 사람의 소원을 담고 바람에 팔랑이고 있다. 방문 지역까지 적힌 꼬리표를 읽던 중 3만 원, 5만 원, 10만 원이라고 적힌 글자를 본다. 이건 뭐지? 잠시 생각하다가 그게 바로 등 값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내고 싶은 만큼 낸다는 건 알겠는데 굳이 금액까지 적어야 했나 의문이 든다. 저마다의 소원을 3만 원짜리와 10만 원짜리로 나누는 것 같아 영 보기가 거북했다. 돈이 오가는 업무 편의상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싶지만 부처님은 금액의 많고 적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실 텐데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이렇듯 옹졸하다.


  조용히 걸으며 경내를 살피다가 선물 가게가 보여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런 곳에 오면 내가 찾는 물건은 딱 한 가지, 바로 책갈피다. 다양한 모양과 질감의 책갈피를 구경하고 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가격도 부담이 없어 어디를 가나 책갈피 한두 개쯤은 사는 버릇이 있다. 예전에 밴쿠버에 간 적이 있는데 도서관에 있는 작은 선물 가게에서도 짧은 영어로 ‘북마크’를 달라고 했다. 이런 나의 책갈피 사랑을 잘 아는 남편의 터키 방문 기념 선물도 역시 책갈피였다.


  오늘은 긴 고리 모양의 책갈피를 선택한다. 인사발령으로 떠나는 동료를 위한 선물이다. 물론 책과 함께다. 선물할 책도 이미 머릿속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 한 권과 책갈피를 선물할 수 있는 기쁨. 이 사람에게는 어떤 책을 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행복. 사는 게 뭐 별건가, 이런 게 사는 거지.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큰 소리로 우는 꼬마의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인 듯 보이는 젊은 남성이 아이폰을 준다고 해도, 업어준다고 해도 꼬마는 손사래를 친다. 불국사 쪽만 가리키며 걸어 들어간다. 집에 가지 않고 다시 불국사를 구경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이런 모습에 지나가던 이들이 미소 지으며 아버지와 아들을 지켜본다. 어린아이도 엄마 품 같은 불국사의 아늑함에 푹 빠졌나 보다.


  나에게 있어 불국사란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의 손을 잡고 말없이 걸어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기차를 타고 불국사역에 왔었노라고. 텅 빈 역 앞에서 너를 생각했노라고. 너를 이해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그때는 친구의 온기를 느끼며 기차가 다니지 않는 불국사역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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