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동역』
지인들 중에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고 칭찬 듣는 사람이 여럿 있다. 이들은 내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색채감각을 지녔다. 상의와 하의는 물론 겉옷과 신발까지 각기 다른 색상을 선택하지만 감탄을 자아낼 만큼 조화롭다. 진한 핑크빛의 옷을 입더라도 누가, 어떻게 코디하느냐에 따라 감각이 뛰어난 이가 되기도 하고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몇 년 만에 찾은 현동역은 불룩한 배를 가진 예순의 신사가 몸에 착 달라붙는 보라색 셔츠와 골반에 걸리는 흰 바지를 입은 듯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노란색 벽체와 파란색 문으로 새로 단장한 현동역 앞에 섰다. 분홍빛의 담벼락도 눈에 확 띈다. 예전의 현동역을 몰랐다면 안내문대로 동화 속의 한 풍경으로 느꼈겠지만 웬일인지 진한 안타까움이 먼저 고개를 내민다. 현동역은 영동선의 산과 바람과 더디게 가는 무궁화호와 잘 어울리는 역이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때면 종종 등장하곤 하는, 작고 소박한 역이 현동역의 모습과 많이 닮았었다.
외양도 그러려니와 직원과 마주 보며 표를 끊을 수 있는 작은 창, 벽에 걸린 열차시간표가 있는 맞이방도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낯선 이가 기차에서 내리면 역을 지키던 한 사람의 철도원이 말 한마디 건네곤 하던 곳이 바로 현동역이었다. 나는 언젠가 현동역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며 한 장의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직원이 근무하지 않는 무인역이다. 역무원은 없지만 영동선 무궁화호가 하루에 6번 머물다 간다. 기차를 타는 이들은 기차 안에서 승무원에게 표를 사야 한다.
현동역은 청송, 영양, 봉화, 영월의 4개 군이 모여 만든 외씨버선길의 일부가 되었다. 이 트레킹 코스를 연결하면 조지훈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특히 춘양면사무소에서 시작하여 춘양역과 현동역을 지나는 이 길은 보부상 길이라고 불린다. 옛사람들이 커다란 짐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걷던 때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는 길이라는데 나에게는 아직 생소한 곳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멀리 있지만 보부상 길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걸을 수 있는 코스다. 조만간 18.9km를 걸을 준비를 하고 다시 찾으리라 생각한다.
맞이방 안 벽면에 시집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신달자, 김초혜, 김지하, 안도현……. 문학 장르 중에서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게 바로 시다. 너무 주관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무언가를 읽으면 글자가 눈과 머리를 거쳐 가슴속에서 감정과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시는 읽어도 머릿속에 글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시에 무지한 탓이다.
많은 시집 틈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발견한다. 시집보다 더 반가운 산문집이다. 예수회 신부였던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글들을 쇼펜하우어가 엮은 책이다. 나에게 주어진 지난한 삶이 한없이 내 마음을 짓누르던 20대에 밑줄을 쳐가며 가까이하던 책 중 하나다. 천박한 변덕에 자신을 맡기지 마라. 기괴한 느낌에 흔들리지 않는 자가 훌륭한 사람이다.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고, 자기 인식은 자기 개선의 출발점이다. 책 한 권이 내 삶을 바꿨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혼자서 강물을 바라보며 흐느끼고 있을 때 말없이 다가와 곁에 앉아주는 친구처럼 『세상을 보는 지혜』는 나에게 있어 그런 책이었다.
또 다른 공간에는 역을 찾은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걸려있다. 작은 역에 시라니, 너무 아름다워라, 오래 머물고 싶은 현동역. 아버지의 고향역, 아름답게 꾸며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친 생기게 해 주세요.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찾은 고향역, 아름다운 추억을 또 한 장 남깁니다. 새소리와 화려한 단풍, 봉화를 걷다가……. 고맙다, 이 길을 걷는 내가. 감동적이네요, 50년 만에 와보네요. 현동역을 거쳐 간 이들의 마음이 보인다. 작은 역에 들러 몇 줄의 글을 남길 수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따스한 미소를 가슴에 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타는 곳으로 나가면 현동역 맞은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현동역 안에 있는 건널목을 지나 자기 집으로 향한다. 열차가 많이 지나다니던 시절에는 꽤 시끄러웠겠지만 지금은 펜션까지 들어선, 조용하고 경치 좋은 마을이다.
철길에는 화물열차가 무심하게 멈춰있다. 590430, 590456……. 화차가 달고 있는 고유번호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객차는 물론 화차도 이름과 같은 번호를 지니고 있다. 업무의 편의를 위해 붙인 번호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따라간다. 오, 구, 공, 사, 삼, 공……. 아무도 봐주는 이 없는 화차의 명명식을 혼자서 치른다. 남은 날은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이름을 더 많이, 더 애틋하게 부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바쁘게 살아야 남들에게 보여줄 게 많은 듯 여겼던 교만한 마음이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언제부터인가 작은 책방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현동역은 내가 꿈꾸는 가게의 입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역 앞을 흐르는 강과 눈만 돌리면 볼 수 있는 평화로운 산, 드물게나마 무궁화호가 다니는 곳. 이런 곳에서 나는 예닐곱 명의 단출한 손님을 맞으며 그들과 책을,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오롯이 귀 기울이며 그들과 작고 소박한 우정을 쌓아나갈 것이다.
작은 가게 안에는 나지막한 책장을 몇 개 놓아야 한다. 직장생활이 힘겨운 20대에게,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픈 이에게,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이에게, 인생을 다 살았다고 느끼는 40대에게. 책에 대한 분류도 주인장 마음대로다. 책장 한켠에 내가 쓴 책과 앞으로 쓰게 될 책이 몇 권 꽂혀있는 상상도 한다. 손님이 없을 때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내 인생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을 터이다.
인적이 드문 곳이니 커피머신을 가져다 놓을 필요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내려 손님에게 대접하면 그만이다. 더 나은 커피의 맛과 향을 위해 언젠가 나는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할 것이다. 가게 안에는 늘 커피 향이 배어 있고 스티브 레이먼의 피아노 선율이 부드럽게 떠다닐 것이다. 꿈은 도전하는 자에게만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커피를 파는 소박한 책방의 주인장이 되고 싶은 막연한 소망이 경제적 문제라는 현실을 뛰어넘어 눈앞에 펼쳐질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은 열차가 정차하는 역. 1956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고 2013년 11월 7일 무인역이 되었으며……. 맞이방에 걸린 현동역의 이력서다. 아직은 열차가 정차하는 역. 이 글을 쓴 누군가도 언젠가는 현동역에 열차가 서지 않으리란 걸 예감하고 있나 보다.
먼 훗날에도 언제까지나 기차가 머물다 갈 역……. 현동역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