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역』
오래전, 본사에서 역 스토리텔링 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전국 각 지역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역을 홍보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기차역에 얽힌 특별한 이야기를 노래, 연극, 프레젠테이션 등 나름의 형식으로 발표하는 자리였다. 참관하고 있던 나는 발표가 계속될수록 한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두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평가를 담당했던 교수님의 최종 심사평 역시 각 역마다 발표하는 방법과 스토리의 형식이 놀라울 정도로 엇비슷하다는 거였다. 내가 몸담은 직장이 개성이나 창의력보다 통일성, 일관성을 키우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조직의 특성을 반영하듯 전국의 기차역은 대체로 유사한 모습을 지닌다. 오래된 기차역은 기차역대로, KTX가 머물다가는 역은 그런 역대로 구조와 외형에서 동일한 형태를 보인다. 누가 보더라도 기차역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석불역은 기준점에서 한참을 벗어난 역이다. 사춘기의 발랄함과 반항을 간직한 역이라고나 할까. 삼각형의 뾰족 지붕은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살던 숲 속의 집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 빨강과 파랑의 도발적인 색상까지 더해졌으니 기차역이 맞나를 의심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나 이외에는 고객도 없다. 숲 속의 집에서 나는 오롯이 동화 속의 여주인공이 된다.
역 안으로 들어서니 내부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먼지 하나 없는 듯 반질거리는데도 아주머니 한 분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다. 상대방이 무안할 거라는 생각도 잊은 채 아주머니의 목에 걸려있는 이름표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석불역사 운영관리. 이름보다 먼저 담당업무가 눈에 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철도공사 제복을 입은 직원은 없다.
“어디 가는 손님이세요?”
기웃거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청소를 멈추고 아주머니가 묻는다.
“그냥 역을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근데 역무실이 없네요?”
“여기는 철도직원이 근무하는 게 아니고 양평군에서 관리해요.”
아주머니의 말씀에 사연 많은 석불역이라는 감이 왔다. 석불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려면 직원이라고 밝히는 게 좋을 듯하여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제가 철도직원인데요. 기차와 기차역에 관심이 많아서 시간 나는 대로 자주 다니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여행하시는군요. 그러면 어느 역에 근무하세요?”
“중앙선 풍기역에 있어요.”
아주머니는 작은 사무실 내부를 보여주며 커피 한잔을 타 주신다. 달큼한 커피믹스 한 모금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몰려든 피로감을 사르르 녹인다.
“원래 여기에 기차가 안 설 계획이었어요. 근데 우리가 기차 세워달라고 요 앞에서 데모도 많이 했어요. 석불역은 양평군 교통과에서 관리해요. 오전, 오후 두 사람이 교대로 근무하구요. 주말에는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요. 주말농장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트레킹 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아주머니는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구둔역이 일신역이 되기 전부터, 삼산역이 판대역이 되기 한참 전부터 일신에서 살아온 아주머니는 중학교 때 열차를 타고 구둔에서 양동으로 통학을 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나 역시 아주머니의 단발머리 친구가 되어 함께 기차에 오르고 있었다.
혼자만의 여행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귀 기울이게 만든다.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든다. 열차가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아주머니는 교복을 입은 소녀에서 석불역을 지키는 관리자로 다시 돌아와 굳게 닫힌 승강장 문을 열기 위해 일어섰다.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예쁘게 다시 지어진 석불역을 보고 나니 비둘기호와 무궁화호가 서던, 예전의 석불역사 모습이 궁금해진다. 아주머니에게서 들은 대로 길을 찾아가 보지만 역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테니스장 옆에 있다고 했는데 주변을 몇 번이고 맴돌아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큰길을 따라 두리번거리며 걸으니 우거진 나무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건물을 향해 바삐 걷는다. 테니스장 건물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지평 의병로 434-25. 쇠락의 길로 접어든 지 오래인 건물에 파란 신주소 판이 깨끗하게 붙어있다. 그 모습에 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건물 앞에 서 있는 키 큰 가로등만이 이곳이 기차역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지나다니는 기차도,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는 옛날 석불역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새로 단장한 현재의 석불역에 내어주고 뒷방 할멈이 되어버린 애틋한 폐역이다. 역을 활용하여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보다.
역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이 자리에 수제비와 칼국수를 파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침 주변에 끼니를 해결할 마땅한 식당도 없다. 시원하고 깔끔한 멸치육수에 감자와 호박을 쑹덩쑹덩 썰어 넣은 손수제비와 손칼국수, 메뉴는 딱 두 개다. 거기에 갓 담근 겉절이 한 접시면 금상첨화다. 인심 좋은 주인 할머니가 있어 나와 같은 뜨내기손님에게 찬밥이라도 한 그릇 인정으로 얹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내 배가 고프니 진짜 별생각을 다 한다. 그나저나 끼니는 어디서 해결해야 하나.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어 쫄쫄 굶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까운 곳에 일신역이 있어 잠깐 둘러보기로 한다. 폐허가 된 옛 석불역과 지금의 석불역의 모습도 범상치 않았는데 KTX가 다니는 일신역의 모습은 더 충격적이다. 기차가 다니는 고가다리에 일신역이라는 역명판만 붙어있다. 대합실은 따로 없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승강장이다. 어디선가 반복적으로 기계음이 들려온다. 발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인다. 이곳에서는 표를 살 수 없다고. 원주, 제천행 열차는 1, 2번 승강장에, 양평, 청량리행 열차는 3, 4번 승강장에 선다고.
일신역, 직원이 아닌 기계음이 안내를 대신하는 곳, 대합실도 매표실도 없는 곳. 어쩌면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형태의 간이역일지도 모른다. 경제성과 합리성의 논리에 따라 설계된 일신역 승강장에 올라 한가로운 마을의 모습을 바라본다. 아름답고 소박한 동네 풍경이 펼쳐진다. 모든 것들이 변해가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변하지 않는 것에 더 마음이 간다. 정작 나 자신의 몸과 마음도 변하고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