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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심 Nov 17. 2022

도서관으로 남은 기차역

『동촌역·반야월역』

  기차역의 과거와 현재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 중 하나는 철도노선도다. 2022년의 노선도와 십여 년 전의 노선도와는 차이가 크다. 새로 태어난 역도 있고 없어진 역도 많다. 심지어 기찻길 자체가 없어지거나 변경된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기차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예전의 철도 노선도를 모아두지 못한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마음만 먹었더라면 변경된 철도 노선도를 시기별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기차역에서 일하면서도 정작 역의 탄생과 소멸에 무관심했던 나의 게으름과 무지를 탓할 수밖에.


  동촌역과 반야월역은 2005년 이전의 철도 노선도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두 역은 경부선과 중앙선을 연결하는 대구선에 있었다. 동대구, 동촌, 반야월을 잇던 대구선 구간이 동대구에서 고모에 이르는 신 대구선으로 변경되면서 동촌과 반야월역은 자연 폐역이 되었다. 역사(驛舍)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두 역이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꼭 한번 가보리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신기하게도 다이어리에 가고 싶은 곳을 메모해 놓으면 언젠가는 꼭 가게 된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다이어리를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마음속의 기대감 그래프가 조금씩 상승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대감이 정점에 이르러 적당한 시기와 만나면 마음속의 여행지가 현실의 여행지가 된다. 오늘 가게 될 동촌역도 가보고 싶은 목록에 포함시킨 지 10달 만에 찾게 되었다.


  역을 찾느라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빌라와 어린이집이 있는 어엿한 주택가다. 아무리 폐역을 도서관으로 활용한다고 해도 설마 이런 곳에 역이 있을까 싶다. 하늘에서는 비행기의 굉음이 연신 들려온다. 그제야 인근에 비행장이 있음을 떠올린다. 소음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할 무렵 ‘대구선 동촌공원’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대구선’ 동촌공원이라는 장소답게 짧은 철길이 공원의 주인처럼 돋보인다. 철길 양옆으로는 주인을 깍듯이 모시는 하인처럼 커다란 나무 몇 그루가 우뚝 서 있다. 편히 쉴 수 있는 나무 의자는 환한 얼굴로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이라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동촌역 작은 도서관

  ‘동촌역사 작은 도서관’, 1938년에 지어진 건물답게 외관이 소박하면서도 고풍스럽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질거리는 책상과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이 보인다. 도서관이라고 해서 책 몇 권 갖다 놓고 카페처럼 잠시 앉아서 책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했는데 여느 큰 도서관처럼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역사(驛舍) 안을 꽉 채운 책의 양도 제법 많다. 내부 정리 정돈도 잘되어 있어 오롯이 책 속에만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아늑한 작은 다락방에 안방처럼 깨끗한 장판이 깔려있다. 둥근 테이블이 하품하며 졸다가 반갑게 눈인사를 한다. 키 작은 어린이들을 위한 맞춤 공간이다. 온종일 뒹굴며 얼마든지 책을 봐도 좋을 곳이다.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새우깡을 아삭거리며 만화 「소케트군」을 읽던 내 어린 날과 마주한다.


  「소케트군」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성환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전체가 5권이었던 걸로 기억나는데 각기 다른 네 컷짜리 만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특히 주인공이 세계를 여행하며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룬 마지막 권이 가장 재미있었다. 전 세계의 음식과 문화를 재치 있는 문장과 만화로 그려내어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엄마한테 어린이날 선물로 책을 받은 이후로 아마도 수십 번은 넘게 반복해서 봤을 거다.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고 따스하게 하는 작은 도서관이다. 도서관을 둘러보는 동안 일을 추진했던 담당자들을 생각했다. 어쩌면 사라졌을지도 모를 동촌역이다. 폐역을 활용하여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도서관으로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도 참신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긴 추진력이 더욱 놀랍다. 주민들의 실생활 공간으로 자리 잡아 여전히 소임을 다하고 있는 동촌역. 이곳을 드나들며 책 속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것이 바로 역을 보존하고 살리는 길이 아닐까.


  동촌역을 나와 반야월역으로 향한다. 아파트 단지가 밀집해 있다. 동촌역처럼 이런 곳에 역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위를 몇 번이나 맴돌다가 전형적인 역사(驛舍) 형태의 건물을 발견한다. ‘반야월역사 작은 도서관’. 반야월역은 고층 아파트 곁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동촌역보다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산책로를 천천히 걷는 사람들, 운동기구 앞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가 반야월역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반야월역사는 2010년에 현 위치로 옮겨진 후, 2011년 11월부터 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내부 구조는 2층 다락방이 있는 것까지 동촌역과 똑같았다. 한 아저씨가 여러 권의 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적고 있다. 아마도 이곳은 아저씨의 출퇴근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서 책 속에 빠져든 사람의 모습은 활짝 핀 해당화만큼이나 아름답다.

반야월역 작은 도서관 내부

  1층의 노란색 문을 여니 철도 유물전시관이다. 역사 안의 잘 정돈된 책장만큼 깔끔하다. 동촌역에서는 관리상태가 조금 아쉬웠는데 이곳은 어떨까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다행히 반야월역의 지난날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과거 사진이나 열차시간표도 있었지만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건널목 및 교량 안내판이다. 아마도 업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제작한 듯하다. 철도 교량과 건널목의 위치를 표시한 일종의 안내도인데 철도 직원들만이 알 수 있는 ‘키로정’이라는 숫자로 표시된다. 키로정은 사고 난 지점이나 중요한 작업 위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시설보수 직원들의 관할 구역을 알려주기도 한다. 안내판을 보니 4킬로 947에서 10킬로 807까지가 반야월 보안 담당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반야월 보안. ‘보안’이라는 말을 접하니 신규자 시절에 있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발령받은 지 3, 4일쯤 됐을 때 선배들이 보안을 불러라, 보안한테 연락해라. 라는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예전의 보안관같이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을 말하는 건가 보다 했다. 그래도 신규자라 확실하게 알아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나보다 3개월 먼저 발령받은 동기에게 물었다. 동기가 하는 말, “너 보안관 알지? 그 보안관을 말하는 거야.” 했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아서 “그렇구나. 보안관이구나.” 했다. 그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선배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보안은 철도신호의 보수를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던 것이다. 장난기 많은 동기가 날 놀리려고 했던 얘기를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지금은 나처럼 우매한 신규자를 위해서인지 몰라도 보안이라는 말 대신 신호제어라는 용어를 쓴다.     


  기차역으로서의 소임을 다한 무인역이나 폐역을 둘러볼 때마다 역사(驛舍)의 보존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내·외부를 아무런 변형 없이 그대로 지켰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지만 동촌이나 반야월역처럼 외형의 훼손 없이 실생활에 유익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경우든 사람의 온기가 전해져야 낡고 병든 기차역을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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