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둔역』
경기도 양평에는 유독 기차역이 많다. 2022년 1월을 기준으로 양평역을 비롯하여 원덕, 용문, 지평, 석불, 일신, 매곡, 양동, 삼산역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비록 철도노선도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구둔역도 버젓이 자리 잡고 있던 때가 있었다. 1940년에 첫 손님을 맞이했던 구둔역은 2012년에 중앙선 선로 이설과 함께 폐역이 되었다. 다행히 역사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이미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터라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구둔역에 들어서니 맞이방 벽면에 있는 낙서 가득한 열차시간표가 제일 먼저 나를 맞는다. 초대받은 집에 들어섰는데 주인이 세수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있는 기분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지금은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는 오래된 시간표다.
신입 시절, 기차 시간이 변경될 때마다 역에서 가장 막내였던 나와 내 동기는 판을 하나씩 떼어내어 시간표를 수정해야 했다. 뾰족한 침 같은 걸로 가느다란 숫자 막대를 하나씩 돌려 시간을 맞춰나갔다. 흰색이 있는 막대를 뒤집으면 검은색이 나왔다. 이 흰색과 검은색을 이용해 변경된 열차 시간을 끼워맞추는 작업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약간의 수고스러움도 필요한 일이라 나는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열차시간표는 수시로 변경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매번 툴툴거리며 검은색과 흰색을 뒤집어야만 했다.
‘구둔역사는 근대 문화유산 296호. 낙서는 불법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낙서를 했으면 이런 문구까지 붙여야 했을까. 문화유산을 지켜야 하는 것도 우리요, 그것을 물려주어야 할 사람도 우리가 아닌가. 오래된 열차시간표에 내 인생의 한때가 담겨있어 더욱 안타까운지도 모르겠다.
구둔역이 폐역이라는 사실도 잊을 만큼 사람들로 붐빈다. 이름난 촬영 장소답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범상치 않은 생김새에 남자임에도 제법 짙은 화장을 한 거 보니 흔히들 말하는 아이돌인가 보다. 촬영 관계자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아니에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거지? 아마 이름을 대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대답한 듯하다. 하긴, 유명한 아이돌이라고 해도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요즘 가요를 잘 알지 못할뿐더러 누가 누군지 구분도 못 하는 나다.
촬영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무심코 한 소절 따라 부르는데도 남다르다. 아마도 이제 갓 데뷔하는 신인가수인가 보다. 꽃봉오리를 품은 봄날의 크로커스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이 가득 담겨있는 표정이다. 젊다는 것, 그것은 역시 꿈꾸는 자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타는 곳 쪽으로 나가니 구둔역임을 알리는 검은색의 코레일 표지판이 보인다. 구둔역이 문을 닫을 당시 표지판을 그대로 두었나 보다. 현재는 전국의 모든 역에 파란색의 표지판을 사용한다. 역명을 써놓은 표지판도 파란색이고 역 안의 모든 안내표지판도 파란색이다. 더러는 분천역처럼 관광객 유치를 위해 특별히 조성된 역은 콘셉트에 따라 다른 역명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전국에 있는 코레일의 표지판은 동일하다.
나지막한 승강장의 높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승강장을 지키는 오래된 의자도 반갑다.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철길도 그대로다.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양팔을 벌리고 철길을 따라 걷는다. 아마도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남녀 주인공이 기차역에서 데이트하면 꼭 철길을 따라 걷는 장면이 등장한다.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구둔역에서 촬영한 『건축학개론』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는 철길을 걷는 장면을 통해 풋풋한 대학 새내기인 서연과 승민의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카메라를 현실로 옮겨오면 두 사람은 역 직원에게 단속 대상이 됨과 동시에 며칠 후,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고지서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어야 한다. 과태료를 낼 필요 없는 폐역 철길 걷기. 오늘만은 손녀와 함께 온 할머니도 20대의 아름답고 순수한 수지가 되어 활짝 웃는다.
구둔역을 다녀온 지 얼마 후, 신기하게도 30년 만에 나의 첫사랑을 만났다. 동갑내기였던 그 아이는 시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그 아이의 시를 처음 접했다. 「촌놈」. 제목부터 범상치 않았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현실감각이 있었고 시 속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마음이 좋았다. 잦은 이사에도 그 아이의 시가 실려있는 시집을 가지고 다니다가 얼마 전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며 다른 책들과 함께 처분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몇 해 전부터 고향인 예천에서 버섯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역시 촌놈답게 살고 있었다. 군대 있을 때 내가 보낸 편지가 한트럭은 됐다는 말에 그때 내가 글쓰기 연습을 많이 해서 지금 책까지 내고 있는 거 같다고 대답하며 마음껏 웃었다 그는 낡고 바랜 우리들의 추억 한 조각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들려주었다. 지금은 시를 쓰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구둔역은 첫사랑의 역이다. 첫사랑의 느낌처럼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픈 그런 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