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극히 평균적인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평균보다 웃도는 삶을 살아왔다.
평균보다 높은 지능에 성적은 늘 평균보다 높았고 평균보다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그야말로 '잘 나가는' 삶이었다. 당연히 내 아이도 나처럼 평균을 웃도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고 잘 나가는 삶을 살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기대가 산산이 조각나버렸음을 확인하게 된 건 스텔라의 영유아건강검진 때였다.
영유아건강검진은 아이들의 신체발달과정을 주기적으로 체크함으로써 혹시나 생길 수 있는 건강상의 문제들을 선별할 수 있는 스크리닝 테스트이다. 생후 14일부터 71개월까지 총 8회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9개월~12개월 사이에 이루어지는 3차 건강검진부터는 발달선별검사가 포함되기 시작한다.
발달선별검사는 크게 대근육, 소근육, 언어, 인지, 사회성, 자조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항목별로 해당 나이대에 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리스트가 나온다. 각 질문에 잘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 못하는 편이다, 전혀 할 수 없다의 네 가지 선택지 중 하나로 대답해야 한다.
스텔라는 이미 목 가누기부터 발달이 느렸기 때문에 대근육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혀 할 수 없다'였다.
배를 바닥에 대고 앞으로 간다----- 전혀 할 수 없다
앉혀주면 손을 짚지 않고 안전하게 앉아있는다----- 전혀 할 수 없다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면 흔든다---- 전혀 할 수 없다
딸랑이나 숟가락과 같은 물건을 바닥에 두드리며 논다---- 전혀 할 수 없다
등등..
발달선별검사 결과에 따라 심화평가권고가 나오면 아이의 발달에 관해 보다 심도 있는 평가와 관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스텔라는 이미 3차 검진에서 심화평가권고가 나왔고 그 뒤로 이어진 영유아검진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발달선별검사를 작성할 때마다 나는 '이 개월수에 벌써 이걸 해야 한다고?'라는 놀라움과 그걸 전혀 하지 못하는 스텔라에 대한 걱정으로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걱정을 넘어선 두려움, 공포의 감정마저 들었다. 영유아검진은 내게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고, 그걸 하고 온 날은 어김없이 절망스러운 기분에 한없이 밑으로 침잠했다.
발달뿐 아니라 신체적 성장 부분에 있어서도 늘 스텔라는 평균보다 한참 못 미치는 상태였다.
키도, 몸무게도 늘 하위 5프로 미만. 그 와중에 머리둘레만 상위 5프로였다.
이렇게 아이의 신체, 발달상의 지표가 '평균'보다 한참 떨어지는 현실에 나는 매번 절망하고 좌절했다. 아이가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 될까 봐, 평균보다 훨씬 낮은 삶을 살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렇게 아이가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을 만났다.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길들여져 온 평균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평균적인 사람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균은 통계적 분석을 위해서 수학적으로 계산된 임의의 값이자 허상의 개념일 뿐, 그 평균값에 해당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미국 여성들의 신체 치수 데이터를 바탕으로 평균값을 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만든 조각상은 말 그대로 '평균적인' 미국 여성의 신체를 대표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실제로 그 조각상의 비율과 일치하는 미국 여성은 없었다.
우리는 평균이라는 개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영유아 시절부터 신체 및 발달의 평균값을 구하고 상위 몇 프로 또는 하위 몇 프로로 그 아이에게 라벨을 붙인다. 학창 시절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성적 및 학업의 결과는 데이터화된 수치로서 평균에 얼마나 근접하는가, 또는 평균보다 얼마나 잘하는가로 평가된다.
이 평균값이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 아마 지능검사일 것이다.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을 1등부터 쭈욱 나열해 정규분포곡선으로 표현한 값이 IQ이고, 그 평균이 바로 100이다. 즉 지능이 100이면 내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 중에 중간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수능시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의 시험 성적을 1등부터 나열해 상위 0.1프로는 의대에 가고 그 아래부터 차례대로 스카이에 간다. 내가 그 정규분포곡선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내 미래가 달라진다.
그런데 지능검사에서 평균보다 못한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수능시험에서 평균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 역시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인생에서 '평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토드 로즈는 이러한 질문에 단연코 '아니'라고 말한다.
평균은 산업혁명 시대에 효율적으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시스템 하에 필요했던 개념일 뿐, 그 수치는 개인의 다양성과 특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실제로 토드 로즈는 어릴 적 ADHD에 공부도 잘 못했고, 심지어 자퇴까지 했던 학생이었다. 평균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그가, 지금은 하버드대 교수로서 여러 연구활동과 책을 집필한 사람이 되었다. 평균은 이처럼 개인의 특성과 잠재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스텔라가 평균발달에 미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짓눌리던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평균발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클지는 솔직히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또 9~12개월 사이에 '배를 바닥에 대고 앞으로 앞으로 간다'는 기준은 일반적인 기준이 그렇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 개월수에 그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기준은 단지 평균이라는 허상의 값일 뿐, 그보다 더 빠른 아이도 있고 당연히 그보다 더 느린 아이도 있을 것이다.
그 평균이라는 허상의 개념에 목매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마치 미국 여성들의 평균값으로 만든 조각상과 왜 닮지 않았느냐고 아이를 닦달하는 거나 똑같은 꼴이다.
나를 마음공부 모임으로 이끌어주셨던 은사님께서 한 번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만약 네가 스텔라와 무인도에서 둘이만 산다고 생각해 보아라. 그래도 과연 스텔라가 느린 것이 문제가 될까?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무인도에 살면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당연히 느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느리고 빠르고의 개념조차 없을 것이다.
그때 또 한 번 큰 깨달음이 왔다.
스텔라가 느린 게 문제가 되는 건 내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남들보다 느리니까 문제였고, 남들보다 못하니까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 비교의 덫에 나를 가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내 기준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니 너는 문제가 있어, 너는 치료받아야 해, 너는 부족한 사람이야, 너는 장애아야! 라고 라벨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스텔라의 어제와 오늘만 바라보기로 결심한 건.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평균발달속도에 비교하지도 말고, 오로지 아이의 어제와 오늘만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제보다 오늘 티끌만큼이라도 발전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하고 칭찬해주자고 다짐했다.
아이는 여전히 평균발달속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 아이에게 세상은 '발달장애'라는 라벨을 붙였다. 그러나 나는 그 라벨 뒤에 가려진 아이의 고유성과 온전함을 본다. 지금 아이의 발달이 평균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아이가 가진 잠재력과 개성이 무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나는 스텔라가 완전한 존재로서 자기만의 속도와 고유함을 통해 스스로를 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기다려주기로 한다. 평균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 우주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