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 효과
저 달이 내가 쳐다보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부정하며 했던 말이다.
과연 저 달은 내가 쳐다보지 않으면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비슷한 의문을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도 던진 바 있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면 과연 소리가 났을까?"
생각해 보자.
내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아무도 없는 아마존의 밀림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면 소리가 났을까?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소리가 났을 거라고 '추측'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소리가 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늘에 달이 떠있을 거라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내가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100% 확신할 수 없다.
달은 떠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렇듯 세상은 내가 보아야만 존재한다.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건 바로 이 의문 때문이었다. 이것은 영자역학뿐 아니라 철학과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다.
과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있을까?
이중슬릿 실험에 의하면 전자는 입자와 파동 두 가지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 관측하기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측을 하는 순간 눈에 보이는 입자로 행동한다. 즉, 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들이 관측하기 전에는, 다시 말해 내가 인식하기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자 속에 들어있는 고양이가 50%의 확률로 발사되는 독가스에 의해서 죽었을지 살아있을지는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에는 죽어있는 고양이와 살아있는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슈뢰딩거 고양이 사고실험은 얼핏 보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당연히 50%의 확률로 고양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여기서 중요한 건 고양이가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상태가 이미 확정된 것이 아니라 두 상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자를 열어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그 상태가 확정된다. 전자가 원자핵의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가지고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확률로써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이고 이게 바로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확률로 존재하던 전자는 관측하는 순간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한 지점에서 눈에 보이는 입자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관찰에 의해서 눈에 보이는 입자가 된다는,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사실을 나는 스텔라가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나름대로 받아들였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들은 엄청나게 빨리 큰다. 하루 이틀 봐서는 잘 모르지만, 어느 순간 보면 '언제 이렇게 컸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키가 훌쩍 자라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입자 역시 파동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관찰에 의해 눈에 보이도록 입자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비단 신체의 성장뿐 아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보이는 운동, 인지, 언어, 사회성 등의 발달도 마찬가지다. 모든 가능성이 아이의 세상 안에 확률로써 잠재되어 있다. 스텔라의 경우 처음에 모든 것이 느린, 조금 불리한 상태로 시작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입자화되기에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발달이 느린 상태가 '확정'되어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스텔라의 세상에는 발달이 느릴 가능성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동시에 존재하므로, 어떤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입자화될 확률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디를 바라보고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내 세상,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아이의 세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바딤 젤란드는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 이것을 '가능태'라고 명명했다.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현실에서 내가 어떤 가능성에 올라탈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자 나의 시각에 달려있다.
스텔라의 발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여러 치료들을 했고 수많은 치료사 및 선생님을 만났다. 그중에는 아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인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한 치료사는 두 돌 막 지난 스텔라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아이는 앞으로도 발달을 따라잡기 힘들어요"
며칠 전에 만났던 치료사 역시 그랬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아이는 평생 장애인으로 살 겁니다"
이렇게 아이의 가능성을 단정 짓고 미래를 '확정'지어버리는 사람들의 세상에는 당연히 그런 모습이 보일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대로 보일 것이므로.
반면 아이의 가능성에 대해 열어놓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자세와 근육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 정도 발달과 학습력인데, 조금만 더 몸을 잘 쓰게 만들어주면 분명히 더 좋아질 수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세상이 입자화될 것이다.
나는 어떤 눈으로 아이를 바라볼 것인가.
내가 바라보는 대로 내 세상이,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아이의 세상이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이 "내가 바라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냐. 그럼 나는 달을 보고 너는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는 거냐 안 하는 거냐"라고 물었을 때 닐스보어는 "인간이 자연을 보든 말든 자연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물리적 실재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당신이 달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달이 존재할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고 바라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양자역학의 실험적 결과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내용들이다 보니 과학자들이 여러 해석을 갖다 붙였다. 가장 대표적인 코펜하겐 해석뿐 아니라 다세계 해석, 파일럿 파동 해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라는 양자역학의 결과를 바탕으로 스텔라의 발달과 가능성의 현실에 대해 생각한 것 역시 하나의 해석일 수 있다.
누군가는 억지 해석이라고,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주장하기 위해 끼워 맞추는 구실로 양자역학을 잘못 사용하는 거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양자역학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세상은 내가 '해석'한 것이다.
세상은 나의 표상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우리의 인식과 해석에 의해 나타나는 표상이라고 했다. 즉,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과 감각, 사고를 통해 경험하는 현상이 바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인 것이다. 이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고, 내가 바라보아야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중첩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이것이 내가 스텔라의 '발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바라보기로 결심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