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 얽힘과 동시성
아무도 영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이 말은 양자역학이 얼마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양자현상 중의 하나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일 것이다.
오래전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부장님이 모친상을 당해 장례식장에 갔던 적이 있다. 부장님은 젖은 눈으로 나를 맞이하시며 말씀하셨다. 어머님께서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돌아가시는 순간 출장 중이셨던 부장님은 어떤 직감 같은 형태로 그것을 느꼈다고 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부모와 자식 간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어떤 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와 자식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부모님은 우리의 마음을 '느낀다'. 그리고 아기는 말하지 않아도 엄마의 감정과 마음을 그대로 흡수한다. 마치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였던 것처럼, 아기와 엄마는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어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하나였던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 마치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는 현상이 양자 얽힘이다. 한번 상호작용 했던 두 입자는 거리에 상관없이 연결되는 '얽힌 상태'가 되어, 한 입자의 상태를 측정하면 그 즉시 다른 입자의 상태가 결정된다.
최근 과학자들은 두 광자(photon)를 얽힌 상태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뜨려놓는 데 성공했다. 두 광자는 연관된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한쪽이 빨간색이면 다른 쪽도 빨간색이고, 한쪽이 파란색이면 다른 쪽 역시 파란색이다. 한쪽이 빨간색일지 파란색일지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관측 전에는 확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양자적으로 '중첩'된 상태에 있는 한 쌍의 얽힌 광자를 A는 비엔나로, B는 베이징으로 보냈다.
비엔나에 있는 A의 색깔이 관찰되는 순간 빨간색이라는 게 판명되면, 그 즉시 베이징에 있는 B의 색깔 역시 빨간색으로 나타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두 입자가 서로 대화를 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니 떨어져 있지만 그냥 하나의 입자인 것처럼 관측되는 그 순간에 서로 같은 색깔로 판명되는 것이다.
이 두 입자를 지구에서 수억광년 떨어진 행성에 보낸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납득 가능한 설명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A의 색이 빨간색이라는 정보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B에게 엄청난 속도로 전달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빛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특수상대성이론을 위반하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두 입자 사이의 상관관계는 정보의 전달과는 무관하다(비국소성, non-locality).
또 다른 설명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 사실 분리되는 순간에 이미 색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숨은 변수 이론이고 EPR 역설을 통해 이를 증명하려 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 얽힘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표현하며 기존의 고전물리학적 방식으로 이를 설명하려 했다. 즉,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양자역학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과학자 존 스튜어트 벨이 고안한 벨 부등식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숨은 변수 이론은 부정되었다. 고전물리학으로는 양자 얽힘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입자의 상관관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측되는 순간 결정된다(확률적 성질).
이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알랭 아스페는 1970년대 후반부터 벨 부등식에 기반한 실험적 연구를 통해 양자 얽힘의 존재를 확고히 하고,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임을 입증한 공로로 2022년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안톤 차일링거 연구팀은 2004년에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해 광자를 약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순간이동' 시키는 실험에 성공해 양자통신과 양자컴퓨팅의 가능성을 열었다.
얽혀있는 두 입자가 사전에 합의한 것도 아니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동일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걸까?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찌 되었든 이 현상은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저 초자연적인 현상 또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모두 이러한 양자 얽힘으로 인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부장님처럼,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애틋한 연인들처럼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의사 칼 융이 말한 '동시성(synchronicity)' 역시 양자 얽힘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놀라울 일도 아니다. 동시성이란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말하는데, 예를 들어 어떤 친구에게 전화를 하려고 전화기를 든 순간 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온 경우가 그렇다. 이런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 적지 않게 경험하곤 한다.
비단 사람과 사람 간에 일어나는 일뿐만이 아니다. 내가 사려고 했던 물건이 마침 세일을 한다든지, 내가 꼭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마침 구인 공고가 난다든지 하는 일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화에서 다루었던 '모든 것은 에너지다'라는 명제에 비추어보면 더욱 확연히 그 실체가 드러난다. 모든 것은 에너지이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한번 상호작용했던 두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상태가 결정되면 다른 하나 역시 그 즉시 상태가 결정된다. 내가 친구의 생각을 떠올린 순간 연결된 에너지장에 의해 친구도 내 생각을 떠올린다.
한번 하나였던 엄마와 자식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다. 부장님이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했던 것처럼, 우리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내 고통을 느끼고 아파하는 것처럼, 스텔라가 내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흡수하는 것처럼.
더 나아가 이 우주의 모든 것은 한때 하나였다.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가 먼 과거 어느 시점의 우주에 있는 수많은 다른 원자들과 상호작용 했을 것이고,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얽혀있다고 볼 수 있다. 나와 우주가 연결되어 있고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관점에서의 깨달음은 내 시야를 보다 넓게 확장시켜 주었다. 내가 겪은 불행과 내 아이에게만 꽂혀있던 시선이, 주변 사람들과 보다 넓은 세상으로 확대되었다.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아등바등 살던 내 삶에서 보다 큰 차원으로 삶의 반경을 넓혀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너와 연결되어 있고, 이 우주의 한 부분임을 안 이상 내가 하는 행동 하나가, 내가 하는 생각이 미칠 영향력을 생각하면 함부로 살 수가 없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푼 친절이 곧 나에게 베푼 친절이고, 내가 길가에 핀 꽃을 보며 행복을 느끼면 그 에너지가 나에게 온다. 엄마에게 받은 무한한 사랑을 내 아이에게 또 주고, 타인에게 받은 선의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베푼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연결되어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