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아야만 존재하는 세상

by 슈퍼거북맘

그때 깨달았다.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나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내가 보는 방식이 곧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과연, 내가 바라보지 않는 세상은 존재할까?

더 나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있는 걸까?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를 부정하며 이렇게 물었다.

“저 달이 내가 쳐다보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면, 과연 소리가 났을까?”


생각해 보자.

내가 집에서 잠든 사이, 아무도 없는 아마존 밀림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면, 소리가 났을 거라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소리가 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달이 하늘에 떠있을 거라고 짐작은 할 수 있지만, 내가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100% 확신할 수 없다. 달은 떠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이렇듯 세상은 내가 ‘보아야만’ 존재한다.

내가 의식의 빛을 비추는 그곳에서, 존재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생각을 처음 접했을 때, 머리로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스텔라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고 있는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슬릿 실험에 의하면, 전자는 입자이자 파동이다. 관측하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관찰’하는 순간, 눈에 보이는 입자로 확정된다. 즉, 이 우주를 이루는 모든 입자들은 인식되기 전까지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그 가능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형태를 입히는 건 관찰자의 의식이다.

다시 말해, ‘관찰’이란 단순히 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창조하는 행위다.


슈뢰딩거의 상자 속 고양이 실험도 마찬가지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어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다. 그 두 상태가 겹쳐져 ‘중첩’되어 있다가,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현실로 확정된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이 원리를 나는 스텔라의 성장과정에서도 보았다.

하루이틀 봐서는 잘 모르지만, 어느 순간 보면 ‘언제 이렇게 컸지?’ 싶을 만큼 키가 훌쩍 자라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혹시 성장도, 발달도, 눈에 보이지 않던 파동이 내 시선에 의해 입자화되는 과정은 아닐까?




스텔라의 모든 가능성은 언제나 확률로 존재했다. 말을 배우는 것도, 걷는 것도,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어쩌면 발달이 느릴 확률이 조금 더 높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어떤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그 현실이 입자화될 확률도 달라질 수 있었다.


내가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세상이, 내가 바라보는 아이의 세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바딤 젤란드는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 이것을 ‘가능태’라 불렀다.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현실에서 내가 어떤 가능성에 올라탈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자, 나의 시각에 달려있다.


스텔라의 치료 과정에서 수많은 전문가를 만났다.

그중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아이는 앞으로도 발달을 따라잡기 힘들어요”

또 어떤 이는 단호히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아이는 평생 장애인으로 살 겁니다”


그들의 말속에는 이미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어 있었다. 가능성이 아닌, 확정된 현실.

그 시선으로 본다면, 세상은 그들 말대로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시선을 택하기로 했다.

“이렇게 근육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정도 발달과 학습력인데,

조금만 더 도와주면 분명히 더 좋아질 수 있어요”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세상에서는 그 믿음이 현실이 된다.

결국, 내가 ‘어떤 눈으로 아이를 바라볼 것인가’가 내 세상을, 아이의 세상을 만든다.

이 세상은 고정된 실재가 아니라, 의식과 관찰이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의 장이다.




아인슈타인이


“내가 바라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달을 보고 너는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는 건가, 존재하지 않는 건가?"라고 물었을 때,


닐스보어는 대답했다.

“인간은 자연을 보든 말든, 자연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 말은 자연이 인간과 무관하게 ‘그저 거기 있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리적 실재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이다. 세상은 누군가의 시선 없이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달이 있다고 ‘믿고’ 바라보면 달은 존재할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당신의 세상에는 달이 없을 거라고.


세상은 관찰자와 분리된 독립체가 아니라, 의식이 비춘 빛 위에서만 형체를 얻는 그림자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내가 ‘해석’ 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세상은 나의 표상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나의 인식과 감각이 만들어낸 해석의 결과라는 것이다.


과학도, 철학도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의식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였다.


세상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보아야만 존재하는 세상 속을 걷는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의 중첩 속에서,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세상이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오늘도 나는 스텔라를 바라본다.

그 안에 느림과 가능성이, 두려움과 기적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중 어떤 세계를 실재로 만들지는 언제나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것이 내가 ‘관찰자’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현실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로 존재한다.


세상은 언제나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의 의식이 투영된 영화였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매 순간 새로운 우주가 상영된다.




이전 13화세상은 한낱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