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보는 천국.
그것은 멀리 있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스텔라였다.
나는 더 이상 그 ‘무언가’가 되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다그치지도,
습관처럼 재생되는 죄책감에 쪼그라들지도 않는다.
더 잘해야만, 더 노력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도.
내가 ‘완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이미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누군가, 더 멋진 무언가가 될 필요가 없다.
그저 ‘나’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빛은
언제나,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스텔라는 그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준 스승이었다.
아이는 내 손을 잡고 기꺼이 어둠으로 들어섰다.
그 어둠 속에서만, 내가 빛임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아이를 바라본다.
내가 나를 바라보던 ‘결핍의 필터’를,
아이를 향해 투사했던 내 불안을 벗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본다.
존재 자체로 이미 완전한 그 모습을.
그 아이 안에서, 나와 똑같은 빛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 빛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제 나는 안다.
‘정상’과 ‘장애’, ‘빠름’과 ‘느림’이라는 구분은, 인간의 언어가 만든 경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어떤 기준도, 존재를 둘로 나눌 수는 없다.
모든 생명은 각자의 리듬으로 완전하게 피어난다. 그 차이는 결핍이 아니라 표현의 다양성, 전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무한한 방식들이다.
스텔라는 ‘다르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스텔라의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을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은 비교와 판단뿐이었다.
이제 나는 그 어떤 라벨도 붙이지 않는다.
그저 존재를 바라보고, 사랑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아이를 통해 전체를 본다.
빛과 어둠, 정상과 장애, 고통과 기쁨이 서로 다른 얼굴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Wholeness and the Implicate Order>에서 말했다.
이 세상에 ‘분리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전체(Wholeness)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 자체가 매 순간 스스로를 펼쳐내는 unfolding이다.
우리가 ‘불완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전체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한 단면일 뿐이다.
스텔라의 느림도 그러했다.
그건 결핍이 아니라, 전체가 자신을 다른 속도로 드러내는 움직임이었다.
아이는 완전함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리듬대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창조’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는 전체가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드러남을 방해하지 않는 일이다.
무조건적 사랑과 수용이란, 바로 그 드러남을 허용하는 상태였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에 앞서는 근본이었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아.
자폐여도, 지적장애여도, 유전자 증후군이어도 괜찮아.
공부를 못해도, 실수를 해도 괜찮아.
엄마는 네가 무엇을 이루느냐보다
네가 존재하는 그 자체를 사랑해.
너는 이미 완전하고 빛나는 존재야.
하지만 그 완전함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완전함이야.
네가 너의 속도로 살아갈 때,
엄마도 함께 자라며 너를 지켜볼게.
내가 나의 두려움과 집착을 내려놓고
아이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찼을 때,
비로소 아이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마치 봄눈이 녹으며 흙 속의 씨앗이 저절로 움트듯,
어떤 힘도, 어떤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그것은 ‘doing’이 아니라 ‘being’의 사랑이었다.
나도, 스텔라도 이미 완전한 존재이다.
우리는 둘이 아니었다.
한 생명이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전체로 다시 스스로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빛은 어둠에서 시작되었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났다.
‘완전함’이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순간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것이 내가 찾던 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