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 개의 진단명을 가진 발달장애 아이의 엄마이다.
자폐스펙트럼, 코핀시리스 증후군이라는 희귀유전자 질환, 그리고 뇌전증.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엄청나게 불행하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이쪽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렇게 보일 것이다.
물론 나도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연히 건강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아이가 진단명을 세 개나 가진 장애아라니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단을 받기 전과 후의 스텔라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진단을 받기 전에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딸이었고, 진단 후에도 당연히 마찬가지다.
달라진 건 내 마음뿐이었다.
내 앞의 상황은 변함이 없는데, 진단을 통해 뭔가 확인사살을 당했다는 느낌에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안다.
진단명은 진단명일 뿐.
그 진단명이 스텔라라는 한 사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진단은 그저, 아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적절한 방향성을 찾기 위한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텔라가 20개월에 걷기 시작하였으나, 언어 발달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발달지연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낮병동에서 같이 치료를 받고 있던 스텔라와 동갑내기 남자아이는 처음에 스텔라처럼 걷지 못하고 발달이 느린 상태에서 들어왔었다.
1년 여정도 집중치료를 받고나더니 그 아이는 걷는 것은 물론이고, 여타 다른 발달도 빠르게 올라왔다. 결국 1년 후에 더 이상 낮병동에서 치료를 받기보다는, 어린이집에 입소하는 것이 더 아이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치료사들의 권유를 받고 퇴원했다.
6개월 정도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스텔라의 발달은 그 아이만큼 빠르게 올라오지 않았고 치료사들은 '통합어린이집' 입소를 권유했다.
그때 느꼈다.
스텔라의 발달지연은 단순한 발달지연이 아니라는 것.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떠올린 것은 자폐스펙트럼이었다.
여러 정보들을 찾아본 결과, 보통 병원에서는 세돌은 지나야 자폐 여부에 대해 진단을 내린다고 했고, 우리나라에서 자폐로 가장 유명한 세브란스의 천근아 교수님은 진료예약이 3년 후에나 가능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당장 자폐에 관한 여러 책들과 자료들을 보고 조기개입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진단명’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아이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파악하고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방향을 잡는 게 중요한 것이다. 결국 그로부터 몇 년 뒤, 예약을 걸어놓았던 대학병원의 유명한 교수님들 여러 명으로부터 자폐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세브란스 천근아 교수님의 권유로 이전에 받았던 유전자검사보다 더욱더 광범위한 유전자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코핀시리스라는 유전자변이 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오히려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스텔라가 왜 그렇게 발달이 느리고 밥을 잘 안 먹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완벽하게 납득이 되었다.
사실 이런 유전자검사 결과로 뭐가 나왔다고 해도 치료방향이 딱히 달라진다거나 치료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굳이 유전자 검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었지만, 아이에 대해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더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바꿨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해당 증후군의 예상 가능한 예후들을 미리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할 수 있다.
스텔라의 뇌전증 역시 이런 맥락에서 미리 파악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 스텔라가 종종 멍 때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자폐 아이들의 경우 이런 모습이 흔하기 때문에 분당서울대 유전학과 교수님은 내가 뇌파를 찍어보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하셨다.
그러나 내가 우겨서 찍었고 결국 경기파가 발견되었다. 스텔라의 경우 엄마인 내가 매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잘 파악하기 힘들 정도의 멍한 증상, 즉 소발작의 형태로 경기가 있었던 것이다.
한 달 정도 항경련제를 복용했으나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판단한 세브란스 신경과 교수님의 의견으로 투약을 중단했다.
그 뒤로 스텔라는 미국에 와서 항경련제 투약 없이 식단을 통해 뇌파를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는 24시간 동안 뇌파검사를 하므로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뇌전증 진단은 받았지만, 세심한 케어를 통해서 경기파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리를 해주면 된다.
코핀시리스증후군의 예후 중 하나가 바로 뇌전증이다. 자폐 아이들의 30프로가 역시 뇌전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사실 현대의학에서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극히 일부밖에 진행되지 않아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전자 변이도 많다고 한다. 자폐 진단을 받은 아이들 중 많은 수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유전자 변이로 인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스텔라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확하게 원인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한 대비를 할 수 있으니.
진단명이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아이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적절한 케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포인트 하나 더,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진단명에 매여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폐스펙트럼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아이를 그 진단명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이가 희귀유전자증후군, 또는 뇌전증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한국 사회에서 특히 자폐 진단을 받기 꺼려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적 낙인 효과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낙인뿐 아니라 아이의 부모 역시 진단을 받고 나면 그 진단명에 갇혀서 아이의 모든 특성과 가능성을 차단한 채 그저 '자폐 아이'로 보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자폐를 극복할 수 있냐 없냐에 관한 말이 아니다.
또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인하라는 뜻도 아니다.
단지 자폐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아이가 가진 잠재력의 싹을 다 잘라버릴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나 역시 칠흑 같은 동굴 속에서 많이도 주저앉아 울었다.
아이가 가진 진단명은 현재 가진 어려움을 이해하고 지원해 주기 위한 도구일 뿐,
아이에게 영원히 새겨질 '주홍글씨'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