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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심자의 행운 Oct 20. 2024

독립보행이 뭐라고


스텔라가 독립보행을 시작한 건 생후 20개월이 지나서였다.



보통의 아이들이 돌 전후로 달성하는 발달 과업을, 스텔라는 아주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어 완성했다.


보통 "조금 늦되다"고 표현되는 아이들은 돌이 지나도 걷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이 또한 14, 15개월 정도에는, 아무리 늦어도 18개월 전에는 걷는다. 그래서 이 18개월이 "조금 늦된"것과 "신체, 발달상의 이상"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스텔라는 그 기준점보다도 2개월이 더 걸렸다.



목 가누기부터 늦었으니 걷는 것 역시 오래 걸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마의 18개월이 다가오는데도 걷지 못하자 나는 심장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 아이가 평생 걷지 못하게 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 무렵 나는 스텔라가 대체 왜 느린지 원인을 알 수 없어 죽을 만큼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었다. 아마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혼자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얼굴에 생기와 웃음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흡사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송장 모습이었을게다. 



돌 무렵 뇌 MRI를 찍었고 구조적 이상은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구조적 이상은 없으니 그래도 아주 심한 케이스는 아니라고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아주 조금 위안이 되었으나, 내 걱정과 두려움이 나아지진 않았다. 



혹시나 유전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해서 염색체 검사 및 특정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고, 이상 없다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럼 도대체 왜? 도대체 뭐가 문제야? 대체 왜 느린 거야! 하는 대답 없는 메아리만 울릴 뿐이었다.



MRI와 유전자검사로도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자, 나는 할 수 있는 온갖 상상을 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했으니,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집안의 내력이 있는 건 아닌지, 알고 보니 어떤 유전적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러고 보니 남편이 평소에 몸이 좀 허약한 것 같던데 스텔라가 남편을 닮아서 몸에 힘이 없는 건 아닌지 등등 끊임없는 내 상상 속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그게 정말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고 남편이 미워졌다.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스텔라가 느린 건 남편 때문이야!



이런 사고의 흐름은 발달장애 혹은 아픈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스토리이다. 아이가 아픈 경우,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죄 없는 내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나의 짜증과 앞뒤 없는 냉랭함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다. 그가 천성이 착하고 원만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장 힘들고 피해를 본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부정적인 스토리텔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러한 머릿속 스토리텔링을 멈춘 건, 어느 한순간의 깨달음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남편만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이기도 하다는 사실. 스텔라는 바로 내 딸이었다. 남편을 닮았건, 나를 닮았건 어쨌든 스텔라는 우리 둘의 아이이고, 그건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네 탓이니, 내 탓이니를 따지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이 깨달음 이후로, 나는 스텔라가 느린 원인을 찾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 느린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를 어떻게 도와줄 것이냐, 발달을 끌어올리기 위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스텔라가 생후 18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스텔라와 함께 집 근처의 낮병동에 입원했다. 낮병동은 병원에 낮시간만 입원해서 아침 8시부터 4시까지 하루 8시간을 주 5일 동안, 주당 40시간의 집중적인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스텔라는 낮병동에 입원하고 집중적인 물리치료를 받은 후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손을 떼고 스스로 서서 한 발짝을 내디뎠다. 그때의 기쁨과 감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텔라가 몸에 힘이 없어서 신체발달이 느린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걸었으니 됐다, 하고 안심했더랬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어쨌든 스텔라의 독립보행 시작으로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됐다. 늦었지만 어쨌든 완성한 것처럼, 아이의 발달이 느릴 수 있지만 결국은 다 해낼 거라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스텔라는  태아시절 수정이 된 후 심장도 늦게 뛰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개 임신테스트기를 통해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산부인과에 가서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듣고 나면 임신의 확정이다. 심장 소리가 안 들려 유산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장소리를 확인하러 처음 산부인과에 갔을 때 들을 수가 없었다. 의사는 심장 소리가 조금 늦게 들리는 경우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순간의 불안했던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다행히 그다음 주에 갔을 때 심장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지만, 그 일주일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때도 나는 온갖 머릿속 스토리텔링을 통해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고는,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토리텔링을 멈추면서 대신 이렇게 말해주었다. 스텔라는 그냥 생체 시계가 천천히 돌아가는 아이라고. 늦었지만 심장이 뛰었고, 늦었지만 결국 독립보행을 시작한 것처럼, 앞으로 조금 늦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다 해낼 거라고 말이다. 



이 희망은 사실 지금도 유효하다. '평균' 발달 속도보다 느리지만, 어쨌든 스텔라는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여러 발달 과업들이 있지만, 결국은 해낼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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