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왜 또 영양사일까,
이력서 란에 적을 수 있는 유일한 자격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되신 엄마는 늘 내가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길 원하셨다. 소위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자격증 하나로 먹고살 수 있는 직업, 이를테면 교사,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간호사, 공무원 같은 직종을 뜻하신 것 같다.
대학 입시를 향해 달려갈 즈음, 국립대학에서 내 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전공은 많지 않았다. 전공의 선택지를 넓히고 싶어서 차상위권 국립대학을 고민했지만,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는 선생님께 쉽게 설득되었다. 그것이 내가 식품영양학을 선택하게 된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진로가 나와 맞는지, 학과 전공은 내 적성에 맞는지 고민해야 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 채 진학을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점관리, 스펙관리, 진로에 대한 탐구와 학습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공부가 끝났으니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핑계로 4년의 황금 같은 시간을 모두 흘려보냈다. 그러니 지금의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게 당연하니까.
대학 졸업 후 유통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전문적인 역량 향상은커녕, 업체에서 어떻게 식자재 단가로 장난을 치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사장님은 기본적으로 수익을 내는 것에만 집중하셨고, 많이 실망스러웠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먹을 식재료를 납품하는 마인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영양사 면허증을 악용하기까지 하는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상처만 받고 퇴사하였고, 영양사 일에 회의가 느껴졌다.
이후 근무했던 고등학교는 대학을 갓 졸업한 내가 감당하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
지금처럼 학교 급식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업체에서 급식 시설을 해준다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계약이었다. 학교가 갑이었고, 업체는 을이었고, 업체 소속의 나는 을 중에 을이었다.
학교에서 일을 하지만 위탁업체 소속이었으니, 식자재의 품질과 단가에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설상가상 본사에서 함께 파견된 전문 지식도 자격증도 전무하신 상사분까지... 나는 그저 가운 입은 직원에 불과했다. 식단, 조리, 위생, 식자재 관리까지 파견된 상사분이 주먹구구식으로 하시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면 문제 제기를 했겠지만, 그때는 그럴 애정도 열정도 깡도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20대인 나는 조리원 분들의 관리조차 버거웠다. 밥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내가 , 조리사 자격증이 있다고 한들 실전은 달랐다. 어머니 연배의 조리원 분들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협업과 분업이 잘 되어야 하는 주방에서 어떻게 하면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급식에 많은 영향을 준다. 양질의 식재료로 수제 메뉴를 만들고, 주기적으로 신메뉴를 제공하고 싶어도, 조리원 분들의 협업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양사는 가운 입고 우아하게 앉아서 식단만 작성하는 일이라고 아직도 잘못 인식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위생관리, 시설관리, 식재료 관리, 시장 조사, 회계 관리, 공문서 및 관련 서류의 어마어마한 처리 업무를 비롯해서 근무하시는 조리원 분들의 관리, 양질의 급식 제공을 위한 선호도 파악과 끝없는 메뉴 고민, 학교에선 학생들의 영양교육 및 상담업무, 식중독이나 코로나 같은 질병과 관련된 방역과 상시 대책 업무, 수많은 품의서와 결재 상신 업무,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지경으로 막대한 업무량이다. 하루 종일 발바닥에 땀나도록 일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대학 졸업 당시에도 , 지금도 영양사의 보수는 최저시급이다. 반면 위생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최고이다. 한 유치원 식중독 사고로 영양사가 구속까지 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현재는 고등학교까지 무상급식이 체계화되어 있지만 유치원은 이제 시작하는 단계이다. 입찰부터 식자재 구입, 식단관리, 관련 제반의 모든 업무가 나이스 급식 프로그램으로 관리되고 교육청과 관련 기관에 연계되어 있는 학교와는 달리, 유치원은 최고책임자의 재량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서류 업무가 차고 넘치는데 컴퓨터도 영양사실도 없는 유치원과 산업체도 많다. 최저시급도 안되게 받는 급여는 물론이고, 일부 몰지각한 곳에서는 대놓고 교무실 전화를 받으라느니 조리 업무를 함께 하라느니 무례한 요구까지 한다.
수많은 병원과 산업체의 구인 공고에 웃픈 멘트가 있다. "영양실 있음, 영양사 고유 업무만 함, 주방지원 없음, 연차 사용 자유로움, 주 6일 근무하되 평일과 토요일은 4시간씩 근무함. "
당연한 것이 옵션인 양, 당당하게 공고에 올리는 것을 보면, 현실의 열악한 처우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나이가 있으시니까 주방 일도 도울 수 있겠네요? "
"근무를 반나절만 하고 급여를 반만 지급했으면 하는데요. 종일 근무하시고 온전한 월급을 받고 싶으시면 조리원 한 분을 내보내야 하는 사정입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조리원 한 분의 몫을 해주셔야 해요."
그럼 조리원을 뽑아야지 영양사를 왜 뽑는 걸까? 자격증 대여를 공짜로 하겠다는 꼼수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만 출근하시면 안 될까요? 최저시급으로 근무시간당 계산해서 드릴 수 있어요."
마트 시간제 알바보다 못한 처우를 당당히 이야기한다.
실제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이력서를 내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설상가상 원장님이 식단도 짜고 시장도 보신다는 곳도 있다. 집에서 가져온 묵은지로 반찬을 하라는 곳도 있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사례들이다.
"휴무를 이월시킬지 특근으로 해주실지는 윗분께 여쭤봐야 합니다."
휴무날 상황이 급하다고 근무해줄 수 없냐고 해서 근무했더니, 휴무를 이월시킨다고 한다. 휴무를 이월한다는 이런 황당한 발상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 걸까? 현재 근무하는 요양병원의 선임께 들은 대답이다.
"주말근무시간은 병원 규정상 조정이 안됩니다."
주말은 1인 근무이고, 최소 8시 이전에 출근해서 저녁 6시는 넘어야 퇴근할 수 있다. 선임은 주말 근무를 하지 않으니 답답하지 않겠지. 하지만 몇 시에 출근해야 업무가 가능한지 알면서, 출근시간 30분~한 시간 전에 출근하라는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채용공고에 적힌 근무 시간은 휴게시간 1시간 포함 9시부터 6시까지였다. 휴게시간은 밥 먹는 시간 10분이 유일하다. 선임은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윗선에 밉보일까 무서운 모양이다. 후임들의 체력적 정신적 스트레스는 무섭지 않은 모양이다. 같은 영양사라서 그런 선임의 태도가 더 부당하다고 느껴졌다. 병원의 안하무인 노동착취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일반 병실의 격리가 밤중에 해제되면 다음날 조식은 일반식으로 올라가야 하니 퇴근 후 병원 메신저를 계속 확인하라고 한다. 두 가지 경우에 대한 식이 분류 작업을 하느라 한 시간씩 훌쩍 넘겨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다. 추가 근로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보상하실 거냐고 했더니 답이 없다.
1년 연봉 계약서를 쓰면서 큰 욕심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일하고 싶었다. 월급은 적지만 오래 근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내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악한 근무 조건이니 경력 없고 나이 많은 나를 채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간 선임 영양사는 일이 많아서 화장실을 제 때 갈 수 없어서 방광염에 걸렸다고 한다. 영양사 두 명이 동시에 퇴사 의사를 밝히자 그제야 영양사를 추가로 더 채용하겠다는 대답으로 중간선임을 회유했고, 이월하겠다던 휴무는 특근으로 해주겠다며 생색을 내었다.
고함을 지르며 밤에 메신저 확인을 하라던 관리부장님은 더 이상 퇴근 이후에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생색내고 있는 운영진의 태도가 실망스러웠다. 결국 퇴사 의사를 밝혔고, 중간선임은 후임을 더 채용해서 업무 분담을 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근무하기로 했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하고 싶지 않았다. 자격증도 있고 전공도 하고 대학원도 다녔지만....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또다시,
영양사 일까,
"오늘 점심 너무 맛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코로나 병동에서 근무하시는 간호사님은, 직원 식당 이용을 못하고 식당에서 올려주는 도시락을 드신다. 국도 반찬도 식어서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맛이 떨어질 텐데 이런 감사한 말씀을 해주실 때면, 최저시급도 열악한 대우도 다 휘발되고 알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차오른다.
"애기들이 학교 갈 때가 되어가는지 먹는 양이 부쩍 늘었어요.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졌어요. 너무 예뻐요."
유치원의 열악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아기들이 이뻐서 떠날 수가 없다는 한 영양사 선생님의 글이다.
"꼭 좋은 선생님 되셔요~!"
영양교사 실습을 나갔던 초등학교에서 만났던 한 선생님의 인사말이었다. 현직 선생님들도 쉽게 수업할 기회가 적던 당시에, 실습생이었던 내게 흔쾌히 수업할 기회를 주셨다. 버벅거리고 두서없던 생애 첫 수업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실습 마지막 날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간 나에게, 멀리서 꼭 좋은 선생님 되시라고 외치시던 목소리가 너무 따뜻했다.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실습 기회를 주셨던 초등학교의 영양교사 선생님도 지금까지도 고마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기간제 일을 시작하면 언제든 연락 달라고 , 다 가르쳐주시겠다며 손 내밀어주시던 선생님도 감사한 인연이다. 근무 지역이 달라서 연락드리지 못했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선배가 되어줄 날이 왔으면 싶다. 자격증 대여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 몰상식한 처우에 좌절도 회의도 분노도 느끼지만, 그럼에도 이 일은 분명 보람된 일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근무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20대의 철없는 마음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쉽게 포기했던 일들을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늘 있기 때문이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업무에 맞는 처우, 업무를 할 수 있는 환경, 맛있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안전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를 고민하시는 수많은 영양사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하고자 존경의 글을 적고 싶었습니다. 나이는 많아도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초보 영양사인 저는, 일선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닮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또, 다시
영양사로 일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제가 소개한 불편한 사례들은 일부일 수도 , 대다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유치원과 요양병원을 매도하려는 글은 아니니, 오해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운영하시는 유치원도, 환자분들을 위해 애쓰시는 요양병원도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