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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Jul 12. 2023

"살아가야죠. 나 자체로."

'마당이 있는 집'  중에서


"만약 그날 장례식장에서

상은 씨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난 이제야 내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주란이 상은에게 말합니다.

나까지 죽일 계획이었냐고 따져 묻는 그녀에게, 상은 덕분에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해요.



주란은 남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

부끄럽지 않은 아빠이기를 바랐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진심이 달랐습니다.

주란을 한 인격체가 아닌 소모품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버리고 새로 사는 화병에 꽂힌 꽃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잘못된 줄 알면서 하는 것과 옳다고 믿으면서 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나쁠까. 의미 없는 고민입니다.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나쁜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나쁘지 않은 게 될까요? 너를 위해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를까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변명일 뿐입니다. 변명을 한다는 건 변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폭력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뜻이겠지요.


남편은 주란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고립시켰주란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서서히 세뇌시켰습니다. 결국 스스로 믿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상은도 남편의 폭력에 갇혀서 고립되어 있었어요. 어머니도 모른 척하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세상을 믿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탈출하고 싶었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


가스 라이팅을 하는 사람은 영악할 만큼 상대방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요. 상은과 주란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었다면 달라졌을 거예요.

두 사람은 어머니에게 외면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란의 어머니는 큰딸을 잃은 슬픔에 갇혀 딸을 보지 않았고, 상은의 어머니도 절박한 자신의 상황만 보느라 딸의 상처를 외면했습니다.


주란 혜수를 만나면서 용기를 내었고,

상은을 만나면서 자신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의심하면서 자신을 믿기 시작해요.

언니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자신을 죄책감 속에 살게 했던 어머니에게 사과해 달라고 요구했고, 어머니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옭아매던 시간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문을 열고 한 걸음씩 발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눈, 코, 입을 가리고 구속했던 남편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금당했던 혜수의 과거는 주란의 현재이기도 합니다.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를 맡지 못한 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혜수가 주란의 집 앞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 주란은 아들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다른 선택을 할 거냐는 주란의 질문에

상은은 "아마도."라는 대답을 합니다.

상은은 한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두 사람을 살린 거라고 말합니다. 아내를 잔인하게 학대하던 남편은 자기 핏줄에 대한 애착이 컸어요. 상은이 이혼을 요구했다면 남편에게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죽음까지 남편에게 저당 잡힌 삶이 과연 살아있는 것일까.




주란과 상은은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나 자체로.

살인 현실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뉴스에서 접하는 가정폭력의 결말이 가해자나 피해자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유. 가해자는 자의로 폭력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니, 멈출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폭력은 영혼을 지배합니다.

한 번도 여러 번도 같은 폭력입니다.

한 번의 폭력은 다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만들어냅니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폭력에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남편을 설득하지 못했고, 살기 위해 남편을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주란은 평화로워 보입니다. 남편의 보호 아래 살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기 때입니다.


"상은 씨, 살아가고 있어요?"


"네, 살아가는 중이에요.

주란 씨는요?"



"저도요.

나 자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어딘가에 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온전히 있는 삶이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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