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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 -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려면 그려봐야 한다.

by 이롱이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려면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는 이 같은 말로 그가 살아온 삶의 철학을 표현했다. 우리가 피카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중 하나는 그가 미술 이외에도 조각, 도예, 판화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예술가였다는 것이다. 그중 단연 천재적인 실력을 보인 미술에서, 그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당대의 주류 화풍인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안정된 삶이 보장됐던 그가 입체파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자 했을 때, 그의 친구는 "가난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냐"라는 질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과거의 영광을 잘 재현해내는 보통의 화가가 아닌 새로운 정신과 개념을 창조해내는 혁명적인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다양한 경험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분명히 알도록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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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기생충>(2019) 프로덕션 디자인


영화 <기생충>(2019)이 칸 영화제에 갔을 때 심사위원장은 봉준호 감독에게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집을 골랐는지 질문했다고 한다. 봉 감독은 이에 대해 "모두 세트였다"라고 답했고, 모두가 매우 놀랐었다며 당시의 감회를 밝힌 적이 있다.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프로덕션 디자인을 가능하게 한 이하준 미술감독은, 화면 속 나무 한 그루부터 풀 한 포기까지의 미장센도 허투루 스크린에 내보인 적이 없기로 유명하다. 변기가 가장 위에 있는 기택네 집 화장실은 실제 이 감독이 살았던 반지하 자취방에서 영감을 얻었다. 냄새를 시각화하기 위해 직접 음식물 쓰레기를 제조해 파리가 꼬이게 했으며, 실제 같은 기름때는 세트 주변에서 가스레인지로 삼겹살을 구워 만든 결과물이었다.


영화계에서 촬영, 조명, 음향, 미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단순히 '기술자'라고 부르지 않고, 독립적 예술가인 '감독'으로 부르는 데에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다. 하나의 장면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정해진 방법도, 한계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장면이 오로지 감독의 창의성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업은 그 자체로써 이미 예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의성의 근간은 예술가가 어떤 경험들을 했었는가에 달려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의 말을 빌리자면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인 것이다.



미장센에 대하여


미장센(mise-en-scene)은 장면 속에 무엇인가를 놓다는 뜻의 프랑스어로, 영화감독의 의도를 넌지시 전달하기 위해 화면 속 모든 시각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구성하고 배치하는 작업을 말한다. 본래 연극 장면 속 무대의 구성이라는 뜻으로 시작하였는데, 현재에는 영화 장면 속 화면의 구성이라는 뜻으로 더 알려졌다. 미장센은 구체적으로 프레이밍 기술(숏의 크기, 카메라 앵글, 카메라 움직임 등), 배치된 인물의 역할이나 인물 간의 관계, 소품, 의상, 세트, 조명의 스타일 등 프레임 안에 포함되는 모든 요소를 연출의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미장센은 연극, 영화와 같은 극 매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미학(美學)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은 딥 포커스를 활용한 미장센 연출의 교과서적인 영화이다.


몽타주가 화면과 화면의 병치에 따른 연관성을 강조하는 반면, 미장센은 한 화면 내에 여러 정보나 상징을 배치하여 관객이 능동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위 영화 <시민 케인>(1941)의 장면은 딥 포커스(초점을 화면 전체에 골고루 맞게 하는 촬영 기법)를 활용한 미장센 연출의 교과서적인 장면이다. 케인의 어머니는 아들이 더 풍족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후견인 대처에게로 보내기 위해 서류에 서명하려고 한다. 전경에는 어머니와 대처, 중경에는 아버지, 후경에는 케인이 있다. 관객은 슬픔과 고통이 섞인 표정으로 서류에 서명하는 어머니를 볼 수도 있고, 무기력하게 사태를 방관하는 아버지를 볼 수도, 이 사실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케인을 볼 수도 있다. 관객의 능동적인 선택에 따라 한 장면 내에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해석해낼 수 있는 것이다.



미장센이 주는 소소한 슬기, 래퍼런스


미장센은 래퍼런스(reference)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래퍼런스란 창작물을 만들거나 감상할 때 영향을 받은 다른 창작물을 뜻한다. 앞선 <시민 케인>의 장면을 관객이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도 그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비슷한 상황이나 감정을 경험했거나 혹은 다른 작품을 통해 비슷한 맥락을 접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래퍼런스는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공통분모를 만들어 개연성을 부여하고, 감정적인 교감을 통해 진실하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말한 마틴 스콜세지를 래퍼런스 하며 그의 영화를 통해 공부했었다고 고백했다. 인문학 스타강사 조승연은 봉준호의 인기비결이 폭넓은 래퍼런스에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세계 각지의 영화, 노래, 건축 등의 문화적인 요소를 래퍼런스로 사용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래퍼런스가 부족해도 자기 문화의 래퍼런스를 통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봉 감독은 여러 나라의 문화를 자기 언어로 가지고 있다. 내 것, 남의 것 따지지 않고 좋은 문화라면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여겨 공부하여 체득한 결과이다. 누군가와 소통하고자 할 때 그들의 문화를 래퍼런스로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의도와 감정은 진실되게 전달될 수 있다.


개인이 영화 속 미장센을 제대로 해석하고 향유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 명의 예술가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경험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가가 가진 래퍼런스의 조합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 책장에 다양한 경험이라는 래퍼런스를 꽂아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기생충 속 박 사장 집 몇 평?... 미술감독이 답하다", YTN, 2019.06.16.

봉준호, <기생충>, 바른손이엔에이, 2019.

이종승, 「미장센」, 아모르문디, 2016.

"기생충 해외반응 외신 평론 읽어보기", 조승연의 탐구생활 유튜브,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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