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의 실망스러운 단면들을 드라마에 담고자 노력한다.
세계적 아시아계 영화감독인 이안(Ang Lee)은 드라마를 이처럼 설명했다. 드라마(drama)란 본래 고대 그리스의 희극과 비극을 통칭하는 말로 배우에 의해 모방된 행동을 뜻했다. 다만 영화계에서는 관행적으로 드라마의 뜻을 '현실적인 등장인물들이 겪는 있을 법한 사건들을 진지하게 다루는 장르' 정도로 사용했다. 때문에 이안 감독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건인 인생의 실망스러운 단면들을 드라마에 담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주인공이 겪는 고통과 실망의 순간에 감정이입을 한다.
영화 <괴물>(2006)은 이러한 드라마의 요건을 절묘하게 담아냈다. <괴물>의 주인공 강두는 한강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소시민이자 딸바보 아빠인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한강에 나타난 괴물에게 납치된 딸 현서를 구출하기 위해 큰 고통을 겪는다. 괴물의 압도적인 힘과 공권력의 계속적인 방해는 거듭된 실망을 안겨준다. 설상가상 아버지 희봉이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의 목숨을 건 사투를 통해 괴물은 처치되고 딸 현서를 구출하게 된다.
천 하룻밤의 이야기라는 뜻의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왕 샤흐리아르는 왕비의 불륜 소식에 충격을 받은 뒤부터 처녀와 하룻밤을 자고 처형하는 일을 반복했다. 온 나라가 시름하자 학살을 멈추기 위해 고관의 딸이었던 셰에라자드는 이를 해결하고자 왕비가 되기로 한다. 그녀는 왕과 하룻밤을 보낸 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일 밤 흥미진진한 부분에서 이야기를 끊고 다음 날로 넘기는 것을 천일일(千一日) 동안 반복했다. 왕은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결국 왕의 원한이 누그러져 학살은 중단되고, 그녀와 잘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이야기(story)와 말하다(telling)의 합성어로써, 이야기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하워드는 「시나리오 가이드」에서 좋은 이야기의 조건으로 아래 5가지를 제시했다.
① 주인공 :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누군가(somebody)에 대한 이야기이다.
② 목표 : 그 누군가는 어떤 일(something)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한다.
③ 장애물 : 그 어떤 일은 실현 가능하지만 성취하기가 매우 어렵다(difficult).
④ 갈등 : 스토리는 개연성을 갖고 전개 과정에서 정서적인 충격(emotional impact)을 줘야 한다.
⑤ 해결 : 그 스토리는 만족스러운 결말(satisfactory ending)을 가져야 한다.
목표를 향한 과정에서 장애물과 갈등으로 고통과 실망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찾아볼 있다. 시학에서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연민이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발생하고, 공포는 나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발생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해결인 클라이맥스(절정)를 통해 지금까지 긴장시켰던 감정이 모두 해소될 때 비로소 카타르시스(감정의 순화 또는 정화)가 발생한다. 그는 드라마의 목적이 카타르시스라고 할 만큼,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끝난 후에는 이를 들은 사람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토리텔링은 동기유발의 중요성을 알게 한다. 동기유발이란 특별한 계기로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마음을 먹게 되는 내적 과정을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 동기유발을 통해 상대방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일례로 불행한 세계사이지만 스토리텔링의 힘을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나치 독일의 히틀러이다.
1928년 11월 16일, 히틀러는 1만 8천 명 앞에서 첫 공개연설을 시작했다. 연설의 요지는 "우리의 불행은 모두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니, 고통받는 서민 대중이 힘을 합쳐 그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현 정부를 때려 부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1,320억 마르크를 배상해야 했는데, 이는 독일의 연간 예산인 60억 마르크를 한 푼도 쓰지 않아도 22년을 내리 갚아야 하는 금액이었다. 1928년 140만 명이던 실업자는 2년 후 310만 명으로 급증할 만큼, 국민 대부분이 빈민 신세로 전락하여 큰 박탈감과 생활고 속에서 허덕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대중에게 "이 모든 불행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라를 위한 위대한 일꾼이니, 위대한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합시다!"라며 동기유발을 했던 것이다. 그는 스토리텔링으로 표류하는 민심을 휘어잡았고, 위대한 독일이라는 소속감을 부여했으며, 공동의 적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내세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1933년 일당독재를 완성했고, 1939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해 인류 최악의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영화는 이야기가 끝난 후 "작가의 의도는 ~였습니다."라며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사건 이면에 감춰진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발견한다. 누군가 입이 닳도록 "열심히 좀 살아라."라고 한다면 잔소리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누군가 작품을 본 뒤 동기부여를 받아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하게 된다면 진짜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스토리텔링은 동기유발을 통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봉준호, <괴물>, 청어람, 2006.
로베르트 비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20.
데이비드 하워드, <시나리오 가이드>, 한겨레신문사, 1999.
함규진, <개와 늑대들의 정치학>, 추수밭, 2018.
"저 인간이 지지를 받았던 진짜 이유 #41", 간다효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