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내공의 짜파 장인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짜라짜라짜-짜아아아아파게티. 농심 짜파게티."
해가 어스름한 시간이다. 이모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직 퇴근 전이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 통화를 했는데 아직인가 보다. 저녁을 먹었는데도 살짝 출출한 그때. 언니와 나를 홀려버린 노래. 티브이에서 흘러나온 운명적 CM송이었다. "오늘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언니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눈이 마주쳤다.
"언니야, 우리 집에도 저거 짜파게티 2개 있다 아니야? 나 저거 짜파게티 먹고 싶어."
바야흐로 일천구백구십 년쯤. 내 키가 가스레인지보다 크지 않았던 걸로 봐서는 조금 더 전일지도. 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나마 살짝 성숙했는지 불을 다룰 줄 알았다. 키가 작아 냄비의 보글보글한 상황을 볼 수 없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낑낑대며 의자를 가지고 와서 곁에 붙어 섰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짜파게티 보조 요리사가 되었다.
"언니야, 이거 끓여 봤어?"
"아니, 근데 이것도 라면이잖아. 엄마가 라면 끓이던 대로 하면 될 거야."
"우와, 언니야 잘하네! 우리가 이제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어!"
아이들이 하는 생각의 합은 예상보다도 더 짧은 법이다. 조리법이 봉지 뒤에 적혀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짜파게티 요리 회의가 활짝 열렸다. 이럴 수가,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긴장된 순간이다. 과연 우리는 짜파게티 요리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엄마가 어떻게 라면을 끓였더라? 그래! 면과 가루를 같이 넣고 팔팔 끓였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돌리니 이미 행동대장 그녀의 손은 바빴다.
면 하나를 냄비에 넣고, 가루 수프를 탈탈 털어 넣었다. 물과 면발과 스프가 만들어내는 냄새는 강렬했다. 와! 그럴듯한 냄새가 난다. 예전에 엄마랑 중국집에서 먹던 짜장면 냄새랑은 좀 다른 것 같고, 또 라면 냄새보다는 달큼한 향이 난단 말이다. 와, 이 좋은 걸 엄마는 왜 아직 먹지 말라고 한 건지. 역시 맛있는 건 어른들이 많이 먹으려고 높은 찬장에 넣어두는 것인가!
우리도 이제 짜파게티 요리사다. 나, 이효나. 더 이상 짜파게티 안 끓여본 애송이 친구들과는 급이 다르다 이말이지. 어깨를 들썩이며 하얀 대접 두 개를 꺼냈다. 서툰 젓가락질 대신 포크를 선택했다. 포크로 면발을 집고, 냄비를 기울여 국물을 쪼롬히 담았다. 서로에게 몇 가닥이 더 들어가는지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는지 이미 삭제된 기억이 되었다. 강렬한 첫맛만이 혀에 남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한 입 넣었다. 팡, 파방, 팡팡! 머리 위로 폭죽이 터지는 달콤함과 짭조름함.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의 춘장에다 사각 캐러멜을 녹인 느낌이랄까. 라면보다 굵고 굴곡이 더 야무진 면발이 혀를 타고 이쪽 어금니에서 한 번, 저쪽 어금니에서 한 번씩 쫄깃, 쫄깃 씹혔다. 중국집 짜장면발이 갓 스트레이트 펌을 한 보들한 머릿결이라면, 짜파게티 면발은 천연 곱슬머리에 결마다 힘을 준 느낌이랄까. 하지만 또 단단하지 않고 말랑해 몇 번을 씹고 나면 이미 입에서 식도를 타고 주르륵 내려가는 중이었다. 중간쯤 먹었을 때 언니가 말했다.
"이거 다 먹고 밥 말아먹자."
"응!!"
순식간에 면발을 다 먹고, 주걱으로 밥을 한가득 떠서 국물에 말았다. 그렇다. 우리는 라면 국물 만큼 흥건한 짜파게티 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언니야, 근데 말이야. 사진 속 그림이랑 우리꺼랑 좀 다르다 아니야? 왜 우리꺼는 라면 같지?"
"어쨌거나 맛있으면 됐지. 그냥 먹어."
"응!! 알겠어! "
초긍정의 어린이 이효나는 그렇게 짜파게티, 아니 짜장라면을 먹었다. 면발 삶은 물을 비워내고, 거기에 소스를 비벼 먹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거다. 그전까지는 짜장라면을 먹어본 기억이 그닥 없었다. 나름 방목하듯 육아를 하던 엄마였지만 면보다는 밥을 먹으라고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였나. 짜파게티와의 첫 만남은 너무나 짜릿하고, 아쌀하게 기억에 각인됐다.
지금의 입맛으로 당시의 맛을 상상해 보면, 국물이 많아 밍밍하고 덜큰한 짜장맛에 면에는 양념이 배지 않아 슴슴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당시 나의 혀에는 어찌나 그게 달고 짜고 맛있던지. 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여지없이 생각나는 짜장라면. 그날 작은 상에 마주 앉아 김치 한쪽 없이도 맛있게 먹었던 인생의 첫 짜파게티. 맛에 추억이 버무려져 완벽한 맛으로 남았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짜장 사랑. '짜장? 짬뽕?' 물으면 1초의 망설임 없이 '짜장!'. '라면? 짜파게티?' 선택하라면 무조건 '짜파게티'. 그날이 완벽하게 짜장파에 입문한 순간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 문득 생각해 보면 그날은 아찔한 순간이었구나 싶다. 어린 두 아이가 가스 불을 켜고 요리를 했다는 게 말이다. 화상도 화재도 없었던 그 날은 참 다행스런 날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결과적으로 그 성공이 내게 요리에 대한 자신감과 의지를 줬다. 초등학생 때 찌개를 끓여도 봤고, 비빔밥을 맛있게 만드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새로운 맛이 궁금하고, 모든 요리가 신기했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 귀엽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전 중 하나가 새로운 맛에의 도전 아닐까. 새 맛을 경험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이다. 나이가 들수록 단골가게가 늘고, 익숙한 음식만을 선호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음식을 먹으며 혀에 폭죽이 터지는 경험도 귀해졌다. 자주 가는 음식점을 선호하고 늘 먹는 커피를 마시며, 매워서 또 너무 짜서 안 먹는 음식이 늘어간다. 짜파게티 요리사에 도전했던 그 마음이면 어떤 맛도 도전해볼만 하겠다.
요즘도 주말이면 자주 짜파게티 요리사가 된다. 도담이와 동그리는 세상에서 내가 끓여준 짜파게티가 제일 맛있단다. 동그리는 본인이 끓이면 왜 이리 퍽퍽한지 맛이 없다며 내 짜파게티에 엄지를 척! 가슴 쪽에 두 번 스윙스윙을 날려준다. 후훗, 그건 말이지. 보통 내공으로는 어려운 일이지. 물을 살짝 자작하게 남기고 졸이며 소스를 볶듯 비벼야 하는 고급 기술이란 말이다. 그 자작의 양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내 손목 스냅이 허락하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달까. 처음의 그 맛있었던 짜장라면과 정식 조리법의 짜파게티가 적절히 타협을 봐서 만들어진 효나리표 짜파게티.
작지만 소소하지 않은 영업비밀을 하나 남긴다. 자작하게 국물을 남겨서 면발과 국물을 한입에 촤라랍 넣어볼 것. 계란 프라이 따위 없어도, 혀가 깜짝 놀라 박수를 칠 거라 감히 장담한다. 익숙한 것에다 새로움 한 꼬집 뿌려 맛 성장하는 하루 되길 - 35년 내공의 짜파게티 요리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