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소고깃국에 들어있는 남다른 한 가지
“아가, 소고깃국을 끓였는데 언제 가지러 올래? 콩나물이랑 동그랑땡도 해 뒀다.”
이번 주에도 올 것이 왔다. 반찬을 가지러 오라는 어머님의 연락이다. 콩나물에 동그랑땡 까지라면 시일을 늦출 수 없는 유통기한 짧은 호출이다. “어쩌죠, 약속이 있어 못 가겠어요.” 라든지, “저 이번주는 소고깃국 안 먹어도 돼요. ” 랄지 하는 대답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그 서운함의 서늘함이 우리 집 안방을 잠식하고, 다음 주말은 냉기 가득한 얼음밥을 먹어야 할지 모른다. 그래, 따뜻한 밥을 먹는 쪽을 택하자. 차로 15분의 거리. 더 세게 밟을 수 있는 액셀레이터를 자꾸만 살그머니 밟게 되는 이유를 알지만 모른 척하며 그곳으로 간다.
코뚜레에 코가 걸린 소처럼 끌려가다 대문을 여는 순간, 음식 냄새 때문일까 시부모님의 환한 얼굴 때문일까 반가운 마음이 사골사골하게 우러나온다. 서둘러 오지도 않았으면서 가장 바삐 온 사람인 양 손을 씻고 부엌으로 달려가면, 가스레인지 위에 소고깃국이 곰솥째 팔팔 끓고 있다.
“반은 여기서 먹고, 반은 가지고 가레이.”
“아버님, 어머님 내일 아침에 데워 드세요. 오늘 먹고 가면 저희는 괜찮아요. 어머니.”
“아이고! 아니다. 나는 또 끓이마 되지. 이거 갖고 가서 내일 한 끼 해결해라”
‘어머니... 사실... 이 국 가지고 가면 저만 먹어요...’
이 말이 입술까지 나오다 쏙 들어간다. 수 년째 쉬지 않고 먹었던 탓인지 도담이와 동그리는 집에 싸 온 소고깃국에 시큰둥이다. 왜 이토록 소고깃국인가. 미역국, 시래깃국, 콩나물국 많고 많은 국 중에 이 외골수적이고 중독성 강한 메뉴의 이유는 대체 뭔가. 동그리는 내게 눈을 흘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나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날은 유독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마침 입맛에 맞았는지 운명 같은 날이었다. 빨간 국물을 한 술 떠 입에 넣으니 고춧가루의 맵싸한 맛이 혀에 닿는다. 기름기를 쏙 뺀 국물에 푹 끓인 소고기가 결마다 부드럽게 씹히고, 몸만 퐁당 담근 숙주가 아삭하게 살아남아 입에 들어왔다. 대파와 버섯이 이따금 몰캉대며 씹히는 느낌까지. 버라이어티 하다 정말. 무엇보다 얼큰한 감칠맛이 캬. 너무 짠데 너무 맛있는 이 음식을 어이할꼬. 이곳이 시댁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정신 놓고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 소고깃국 너무 맛있어요. 어떻게 끓이신 거예요?”
정확히 그날부터 시작됐다. 어머니의 주말 소고깃국 러시. 시댁에만 오면 깨작대던 며느리가 삼일은 굶은 듯이 한 그릇을 비우고, 맛있어 죽겠다고 리뷰까지 했으니 얼마나 반가우셨을까. 어머니의 소고깃국은 버전이 다양해져 갔다. 말린 표고를 넣기도 하고, 고사리를 넣다가 콩나물을 넣다가, 숙주를 넣다가. 나름 다른 류의 소고깃국을 끓이시곤, 그 재료를 구매해서 완성하기까지의 무용담을 하시는 게 어머니의 큰 재미가 되었다. 나는 사실 소고깃국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고 두 어번 말씀드렸는데, 체면치레 한다 생각하셨는지 다음 주에도 국을 주셨다. 어머니는 이미 내게 소고깃국을 주시는 일에 매료되신 것 같았다.
“ 아, 그래요? 오오, 그렇구나. 와, 맛있는데요?” 정도가 전부인 내 리액션에도 어머니는 반가워서 발을 동동하신다. 어머니에겐 같은 소재를 공유할 여자의 귀가 필요했었나 보다. 문득, 정말이지 어느 순간. 어머니의 소고깃국에 마음이 아렸다. 자식 내외와 손주를 보기 위해 며느리가 좋아하는 소고깃국이 필요했던 그녀의 마음이. 먹이고 싶으셨겠지, 먹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겠지. 정확히는 우리가 보고 싶으셨던 거겠지.
“효나야,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네 생각하면서 싱겁게 끓였데이. 어떠노. 네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하시는 모습에서 셰프의 간절함이 묻어난다. 특유의 농담과 함께 엄지 척을 두 손 올려 드리며 “어머니, 소고깃국 명장이십니다.” 찡긋 웃어 답하면, 그제야 안도의 웃음을 그리는 주름진 얼굴. 사실, 시부모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건 딱 이 정도의 다정함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자주 들르는 것, 우리 부부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 정도의 효도. 퇴직 후에 마땅한 취미생활조차 없으신 아버님과 그런 아버님 곁을 24시간 함께 하시는 어머니에게 웃을 거리라곤 우리 부부의 실없는 농담과 도담이의 학교 생활, 도동이의 새로 배운 말들 뿐일 테니.
어머니의 소고깃국은 '너희가 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녀의 소고깃국은 앞으로도 쭉 거절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머니는 소고깃국을 끓여 우리를 만나고, 며느리는 소고깃국을 데우며 어머니 생각을 한다. 음식은 이렇게 닿지 않을 것 같은 마음도 이어주는 깊고 진한 마술이다.
아! 다양한 국으로 사랑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고 말이다. (농담 같은 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