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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Mar 26. 2024

갱시기의 칼칼한 위로 한 그릇

덜 멋있으면 어때, 더 맛있으면 됐지.

  "엄마, 나 갱시기 먹고 싶은데 만들어주면 안 되까?"


  살면서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거라 상상치 못했다. 세상에, 내가 갱시기를 찾다니. 임신을 해서 입맛이 변한 것도 아니요,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목전인 음식이 넘쳐나는데 갱시기라니. 더구나 매운 거라면 질색을 하는 맵찔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갱시기? 그거 맨드는 거는 일도 아니지. 근데 갑자기 갱시기는 왜?"

  “그냥, 먹고 싶어서.”

  “오야, 알았다. 한 번 만들어줄게.”


  어릴 적엔 갱시기가 싫었다. 비주얼도 뒤죽박죽 이게 뭐람. 요리도 밥도 죽도 아닌 것 같은데 엄마는 이 갱시기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왜 이리 자주 끓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떡국떡만 몇 개 집어 먹다 그만이었다. 갱시기가 경상도에서만 주로 먹는 음식이라는 것도 훗날 알았다. 그만큼 관심에 없던 음식이었다. 그런 내가 그날은 갱시기가 너무 그리운 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는데 아무리 조물대도 보글 하고 탐스런 거품이 생기지 않는다. 세제 거품마저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구나. 엉망진창 쌓인 설거지감을 노려 보며 줬다 폈다 주먹질을 계속하다 수세미를 내려놨다. 눈물을 닦아야 했으므로. 눈물이 고인 이유를 한 가지로 말하라면 답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잠시 싱크대에 두 손을 짚고 서서 자그마한 부엌창을 바라봤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나의 삶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살림도, 육아도, 작가라는 애매한 타이틀도 잘해 내고 있는지. 모든 것이 어중간하다 성에 차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면서는 다음 끼니의 메뉴를, 밥을 짓다 보면 아이 숙제는 언제 봐주나, 숙제를 봐주면서는 내 글을 대체 언제 쓰나. 다음은, 다음은. 내가 뭘 해야하지. 쳇바퀴처럼 머릿속이 뱅글 대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을 비워내고 나면 가슴이 텅 비어버릴 것 같다. 가슴이 뜨끈해진다. 손에 젖은 물기를 바지에 대충 닦아 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갱시기가 먹고 싶다고. 지금 생각해도 뜬금없는 의식의 흐름이었다. 갱시기를 한 그릇 후루룹 먹고 나면 뜨끈해진 속이 좀 칼칼해지면서 쑥 내려갈 것 같았다.

  얼마 뒤 엄마가 집에 오셨다. 콩나물과 떡국떡을 사 들고서. 갱시기를 끓이는 건 라면만큼이나 간단하다는 말로 조리를 시작한다. 김치와 콩나물 한 봉지, 떡국떡 한 줌, 그리고 고슬고슬한 밥 한 덩어리면 충분했다.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물과 끓인다. 우리 집 부엌에 김치의 새콤하고 칼칼한 향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거품을 걷어내며 끓이다 밥과 떡을 넣고 한 번 더 보글보글. 콩나물을 넣고 집에 있는 대파와 마늘까지 더해서 조금 더 끓이면 완성이다. 엄마는 뭘 이런 걸 사진으로 찍냐며 핀잔이더니 대파를 위에 흩뿌린다. 귀여운 갱시기 요리사. 그날의 갱시기는 꼭 남겨두고, 글로 쓰고 싶어 사진을 찍어댔다.

 

  갱시기를 한 술 뜨니 "캬"소리가 절로 나온다. 입 안 가득 김치의 향이 퍼지면서 쫄깃한 떡이 씹히다가 콩나물이 아삭댄다. 다음 수저에는 고슬한 밥알에 김치의 맛이 베어 함께 들어온다. 엄마는 경북 김천, 나름 갱시기의 본고장 출신이다. 어릴 적을 회상해 보니 엄마는 속이 허할 때면, 식사 메뉴가 어중간할 때면, 날이 추울 때면 갱시기를 끓였다. 이해하지 못하던 이 맛에 감탄사가 나오는 걸 보니, 김칫물이 밥알에 베듯 나도 갱시기에 물들었나 보다. 이제 알겠다. 엄마가 왜 그토록 이 음식을 애정했는지.

  '예쁘게 썰지 않아도 된다. 정량을 넣지 않아도 된다. 갱시기의 맛은 김치가 내는 거지 요령을 부려서 내는 음식이 아니다.' 늘상 들어왔던 말이다. 뭔가를 잘하고 싶어 마음이 아등바등 일 때 이 뒤죽박죽인 음식이 주는 위로. 좀 대강해도 괜찮다. 시간이 맛을 내는 거지. 요령을 부려서 맛이 나는 게 아니란다. 음식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 이 갱시기는 특징이, 배가 정말 터질 듯이 부르다가도 금세 소화가 돼서 배가 꺼진다는 거야. 정말 신기하지?"

 

 맞은편에 앉아 함께 갱시기를 먹으며 엄마가 말했다. 그랬다. 갱시기는 먹을 때 배가 터질 듯이 부르다 싶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휘리릭 소화가 됐다. 다 소화하지 못할 것 같은 것들도 꾸역꾸역 체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다 보면 어느새 속이 편안하게 내 것이 되어 있겠지. 그럭저럭 소화가 되겠지. 속이 뜨끈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노골노골 잠이 온다. 그날 나는 갱시기, 정확하게는 엄마의 갱시기에게서 적잖이 위로받았다. 얼큰하고 칼칼한 맛이 목젖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울만큼 그날은 맛있는 위로를 얻었다. 그 힘으로 또 하루를 편안히 겪어낸다.


그래, 좀 덜 멋있으면 어때 더 맛있으면 됐지.



 < 김천 출신 갱시기 명장이 남긴 tip point>

 1. 맛이 적당히 벤 김치가 맛의 8할을 좌우한다.

 2. 떡국떡과 밥은 딱 한 줌씩만. 찬밥 있으면 그것도 너무나 오케이

 3. 아삭한 식감이 생명이다. 콩나물 많이, 듬뿍, 아낌없이

 4. 거품 걷어내며 뭉근하게 끓여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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