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주책공사]
2월의 어느 날이었다. 며칠간 이어진 따사로운 날씨에 '이제 봄이 왔나' 성급하게 설렜다 호되게 혼이 난 날이었다. 물러가지 않으려는 겨울바람이 용심을 내는 듯 비바람이 불었고, 거친 바람의 기세에 해는 구름 속에 숨었다. 사실, 바람을 쐬러 가기엔 적절치 않은 날이었다. 따끈한 방에 엎드려 고구마 하나쯤 까먹으면 그저 행복할 날씨였다. 하지만 더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주말, 가보고 싶던 책방에 방문했다 보기 좋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산까지 1시간 반을 달려갔는데, 허탕이라 아쉬웠고 후일을 기약했다. 이대로 포기하면 효나리가 아니지.
며칠이 지났다. 책방 원정대, 벨트를 매시오. 다시 부산으로 출발합니다. 이번 책방은 다른 곳이다. 이름도 재미있는 [주책공사] 원래 가려던 곳이 아니었지만, 얼결에 목적지가 되었다. 원래 인생이 이런 거지! 결국 더 멋진 곳일지 모른다. 특유의 긍정을 한 방울 남김없이 짜내 본다.
[주책공사]와 마주했다. 이름이 특이하다. 책으로 주책을 부린다는 뜻인가? 급한 마음에 이름의 뜻을 찾아보니, 주(Lord)라는 글자는 주인장의 종교적 신념이 담긴 의미였다. 사전 조사 하나 없이 찾아간 책방이었다. 부산에서 꽤 이름이 있는 서점이라는 점, 인스타에서 봤던 내용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흰여울마을 근처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두 어달 전에 새롭게 이전했단다. 독립 책방들이 주로 그러하듯, 주택가의 골목 어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로가 보다는 골목길이 더 어울린다 싶은 마음도 들었다. 비가 오다 말다를 반복하는 날씨에 3살 도동이는 잠이 들었다. 동그리가 도동이를 맡기로. 맡는다기 보다는 차에서 함께 잠을 자기로 했다. 오늘도 역시나 나의 파트너 도담이와 책방에 들어섰다.
날씨 탓이었을까. 평일이라 그랬을까. 고요한 서점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장님이 우리를 반겼다. 사장님은 어떤 분일까. 안 보는 듯이 자꾸 흘긋 살피게 됐다. 책방기행을 다니면서 생긴 습관이라 해야 맞겠다. 책방에 들어서면 책방지기부터 살피게 된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에게 무심한 듯 한 공간에 있는 이 분위기가 주는 매력 또한 오묘하다.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봤을 때, 나도 모르게 "이거 뭐야?"라는 혼잣말을 해버렸다. 연예인 팬레터를 방불케 할 정도의 양이다. 독자의 편진가? 단골들의 코멘트? 잠시 다가가보니, 맙소사. 이 책방에 책을 입고시킨 작가들의 편지와 글이다. 자신의 책을 입고해 준 사장님에 대한 고마움과, 책을 구매할지 모를 독자에게 써둔 글들이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저마다의 절실함이 와닿았다. 내가 책을 낸다면, 아마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내 책을 팔아주겠다고 입고시킨 사장님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일까. 글쟁이로서 함께 울컥했다. 이곳의 매력이 궁금해진다.
이곳 [주책공사]에는 이름과 무관한 몇 가지의 주책이 있었다.
주책 1. 독립서적의 매력
사장님은 어떤 특정 분야에 편중하지 않는 큐레이션을 강조하셨다. 모든 고객을 아우르는 서적의 다양성 말이다. 실제로 벽장에는 대형 출판사의 책들이 꽤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이 서점의 매력은 독립서적이었다. 중앙에 비치된 여러 매대에는 독립출판한 서적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책의 표지에 작가의 코멘트가 붙어 있다. 대형서점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이곳의 차별점이다. 어떤 추천사가 작가의 글귀보다 매력적일 수 있겠나.
사실, 독립 서적에 대한 편견이 있던 나였다. 작고, 얇고, 표지나 내지의 완성도가 떨어지는데 값은 비슷하다는 인식. 아무래도 대형 기획의 손을 타지 않는 투박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책방을 다녔음에도 독립서적을 구매한 적이 없었다. 살짝 죄송하지만 순도 100프로 자기 고백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독립출판 서적에 흠뻑 빠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작가와 책방 주인의 애정이 담뿍 느껴졌고 그 마음이 내게도 와닿았겠지. 망설임도 아까움도 없이 2권의 책을 샀다. 가방에 쏙 넣어 다니고픈 문장이 가득이었다. 도서관에서 구해 읽기 힘든 원석 같은 글귀들이다.
주책 2. 책방지기의 자영업자 소울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더니 흔쾌히 오케이 하셨다. 이 책방이 마음에 들어 부족하나마 글로 쓰고 싶다 했더니, 그때부터 사장님과의 만담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책을 파는 자영업자예요." 라며 말문을 열었다. 독립서점, 동네 책방의 수명이 짧은 것에 개탄하며 '책이 잘 팔리게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올바른 서점 주인의 마인드'임을 강조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흰여울마을'에서 제대로 두 번이나 허탕을 치고 온 나의 입장에선 극렬히 와닿는 마인드였다.
글모임, 독서모임 다 좋지만 결국은 독자들이 책을 이야기하고 가까이함으로써 사게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서점주의 목표여야 함도 강조했다. 실제로 사장님이 책을 사라고 강요하는 느낌 전혀 없는 이 서점에 들어서서 10여분이 지났을 때 '여기 있는 책 중에 하나를 사서 읽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장르도, 내용도 아닌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경험이라 신기했다. 그렇지 않은 서점도 많은데 말이다.
주책 3. 어린이를 위한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
도담이는 어린이 코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글과 그림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책, 이야기 책들이 적지 않게 입고되어 있었다. 내가 책방을 구경하고 사장님과 만담을 나눈 시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도담이는 의자에 앉아 세월이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었다. 공간에 취한 것이다. 미소가 찡긋 지어지는, 눈에 띄는 의자가 두 개 있었다. '어린이를 위한 의자' 다.
"아니, 아이들 앉아 책 읽으라고 놓아둔 의자에 어른들이 앉아서 비켜주질 않으니, 정작 아이들은 앉지를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급한 대로 이렇게 해 두니 아이들이 앉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아이가 있는 부모 마음에선 참 고마운 일이다. 작은 배려가 큰 감동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의자도 그 비슷한 느낌이었달까.
이 책방은 확실히, 서점이다. '사세요.' 강요하지 않지만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오묘한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홀릴 줄 아는 곳. 책방 원정대 도담이가 "엄마, 지금까지 간 곳 중에 난 [주책공사]가 제일 좋았어. 재밌는 책도 많고, 어린이의 의자도 있고. 분위기도 편안했어." 란다. 나름 까다로운 도담이도 홀렸으니 매력적인 곳임은 분명하다.
책방을 어떻게 운영하는 게 올바른 건지, 책을 대할 때 어떤 마음 이어야 하는지. 사실 고객의 입장에서는 크게 궁금하지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책방의 분위기와 입고된 책들, 포인트를 두는 점. 정도가 확인하고픈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곳을 굉장히 간절하고, 절실하게 운영하고 있음을 강조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말귀들을 떠올리니 끄덕여지기도 했다. 당면한 인생의 과제와 상황들을 어떻게 헤쳐가야 하는지 이 책방을 보며 조금 배우고 돌아왔다.
언젠가 또 방문하게 됐을 때 그때 책방의 마음은 어떠한지, 어떤 책이 입고되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