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최인아책방] 선릉점
2월 말 서울 나들이를 계획하며 가장 먼저 염두에 둔 곳이었다. 그간 여러 차례 일정이 꼬여 계획이 주저앉았던 곳. 너무 유명한 맛집을 못 가고 아껴두었던 마음 비슷하겠다. 이번에는 아끼지 말고, 양껏 공간을 맛보자 결심했다. 최인아 씨가 유퀴즈에 출연하기 전부터도 유명한 곳인데, 더 유명해져서 찐 맛집이 된 곳이다.
꽃샘추위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봄보단 겨울에 가까운 서울의 2월. 패딩을 여며 쥐고 향한 곳은 서울 강남이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곳에 다다랐는데, 서점 비슷한 곳이 안 보인다. 두리번 두리번을 4회쯤 했을 때, 눈앞에 오묘한 아우라를 뿜는 건물을 발견했다. 부티끄 내지는 맞춤 정장 가게가 있을 것 같은 앤틱한 건물이다. 주변 건물과 이질적인 듯, 조화를 이룬 매력적인 빌딩과 만났다. 건물 옆쪽에 좁다랗게 오솔길처럼 나 있는 곳에 최인아책방이라는 작은 입간판이 서 있다. 역시 길치는 아닌 것으로!
4층이다. 서점은 주로 1,2층에 있다는 편견을 깬 순간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점에 가는 느낌이 참신하게 와닿는다. 서점으로 들어가려니, 커다란 양문형 여닫이 나무 문이 아닌가. 참 독특하다. 자동문도, 투명문도, 미닫이 문도 아닌 것에 갸우뚱이다. '트렌드보다는 취향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최인아 씨의 강단 있는 취향에 심쿵이다. 사람한테도 겪지 못한 '첫눈에 끌림 현상'을 이렇게 경험한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느낌이다.
1. 저 지금, 저택에 들어온 건가요?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자, 높은 층고에 고개가 절로 올라간다. 여성스럽고 큼직한 샹들리에가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높은 층고만큼 솟아있는 책장에 각종 책이 빼곡이다. 만능 가제트팔이 나와도 닿지 않을 것 같은 높이에도 말이다. 천천히 공간을 느끼며 걷는데, 한쪽 귀퉁이에는 피아노까지 구비되어 있다. 이곳은 그저 그런 상점이 아닌 게 분명하다. 책장을 훑으며 걷다 보니 복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보인다. 구매한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계단 난간조차 앤틱하고 섬세하다. 이곳은 디테일에 투박하지 않으려 신경을 많이 쓴 공간임에 분명하다. 아주아주 책을 좋아하는 부자의 서재에 들어서면 이런 분위기일까? 잠시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2. 자상하고 섬세한 큐레이션
"이거 한 번 잡숴봐." 하는 음식보다는 "배고프지, 이거 먹어봐." 하는 말에 더 끌리지 않나. 광고 기획을 했던 분이 주인장이라 그런지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는 섬세한 포인트가 있다. 곳곳에 적힌 글들에 나도 모르게 ' 맞아, 맞아. 나 지금 마음 이렇지. 이 책들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마흔이라는 글자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적지 않게 살아온 것 같은데, 매 순간 열심이지 않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뤄놓은 건 미미한 것 같은 이 어중간한 나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런 마음이 나뿐은 아니었는지, 마흔의 마음을 쓰다듬는 책들이 많아 반가웠다.
3. 신예작가의 글과 베스트셀러의 절묘한 조화
반가운 책이 많이 보였다. 브런치작가 출신의 책들이 매대 진열대에 다수 보였다. 혼자만의 내적 친밀감을 뿜어낸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에 공감해 주는 책들이 보여 고마운 마음 한 가득이었다. 동네 서점, 독립서점은 책을 입고할 수 있는 물적, 공간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주인장의 취향과 셀렉이 다소 편중되기 쉽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책방지기의 서재에 공감하지 못하고 금세 나올 때는 약간의 허탈감도 느끼곤 했다. 최인아 책방은 이런 아쉬움조차도 읽은 걸까. 처음 보는 작가의 들어보지 못한 책들부터 누구나 알법한 작가의 책들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선택의 편의를 주는 느낌이었다. 큐레이션이 이 책방의 다양한 독자를 만든 동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4. 완성형 북클럽
책방에 한동안 머물며 생각했다. ‘여기는, 매일 와도 지루하지 않겠다.’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구나. 이곳은 책을 읽는 ‘문화’를 파는 곳이다. 매월 책방지기가 큐레이션 한 책을 받아보는 북클럽을 이용하면 이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북토크와 강연에 참석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팸플릿. 그렇다고 또 시시한 북토크도 아닌 게 포인트다. 북클럽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임도 주최하고, 공간을 대여해 주기도 하면서 ‘책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었다. 이곳에 자주 올 수 없는 지방러는 슬프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아니, 어떤 사람인가. 최인아 책방을 나서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것에 자신의 이름을 건다는 것. 그 용기와 발상에 자극을 얻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해져야 하는 게 먼저인지, 유명한 내가 되어 좋아하는 것을 문화로 만드는 것이 옳은지.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있는지 자문했다. 자답은 찾지 못했지만 크게 경로를 이탈한 것 같지는 않으니 오늘도 키보드에 손을 얹을 뿐. ‘생각의 힘’까진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어갈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