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번 먹자는 말

<맛,세이 해 봐요> 연재의 디저트 글입니다.

by 이효나

사람마다 친분을 나누는 각자의 기준은 있겠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만남 끝에 붙는 인사’가 내겐 그 기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사실을 재확인한 사건은 최근의 일이다. 오랜 기간 소식이 뜸하던 대학 동기를 마트에서 마주쳤다. 완벽하게 우연히. 사실 뜸했다고 표현하기도 어렵다. 풋풋했던 그 시절엔 굉장히 친했고, 과방과 식당에서 수많은 식사를 함께 했으며 서로의 대학시절 연애사 정도는 훤히 꿰뚫고 있는 상대였다.이성이지만 이성인 적 없던 순수한(?) 옛 친구. 타고난 게 동안인 동기는 여전히 탱탱한 피부에 힘입어 있었다. 세월은 내 얼굴에만 내려 앉은 건가.


고백하자면 언뜻 내가 먼저 그의 걸음새를 알아봤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다음 칸으로 피신을 간 터였다. 파워 E형의 재질은 다 어디 가고 숨지 못해 안달 난 I형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미로게임 하듯이 요리조리 잘 피해 가다 콰광! 요거트 코너를 도는 순간 뒤통수에 총알처럼 한 마디가 날아들었다.


"어! 이효나!"

최대한 몰랐던 것처럼 놀라움이 드러나게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대에 힘을 줘 답한다. 정말이지 웃긴 건 나란 여자의 낙천이 그 순간 발휘된 것이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닌가. 예전의 날렵한 쉐입과 족히 1.5배가량 상당한 부피 차이가 있을 텐데 한눈에 나를 알아봐 준 그가 고마웠다. 아직 식별 가능한 수준인 건가. 초긍정을 발휘해 본다.


인사를 나눔과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나의 행색을 거울에 비치듯 떠올려본다. 머리는 감았는지, 화장은 했는지, 눈썹은 그렸나? 입술은 왜 안 발라서 아파 뵈는 형색인가? 다행히 바지의 무릎은 제자리에 잘 들어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10초쯤 전으로 돌아가 요거트 코너에는 얼씬도 안 할 텐데, 너무나 독특하고 동명이인일 수 없는 나의 이름을 그가 불러버렸다.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소식 궁금했는데!"

"와! 그래, 이게 몇 년만이야. 그대로네! 애들은 잘 크지?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영어 회화 문제집 1단원 첫 페이지에 나올 문장을 서로 경쟁적으로 내뱉는다. 나이스 투 미츄, 하우 알 유, 아임파인 앤 쥬? 오우, 롱타임 노 씨! 유얼 썬? 오우 쏘 큐트! 같은 류의 말들을 열심히 몇 분 간 주고받았다.

"너무 반가웠어.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봐!"

"응! 그러자. 잘 가!"

엄청 반갑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끝끝내 '기회 되면 밥 한 번 먹자' 거나 '차 한 잔 하자'는 말은 입술 끝에 매달리지 못했다. 매뉴얼처럼 꺼낼 법한 인사가 많건만, 이상하게도 밥 먹자는 이야기는 쉽지 않다.


( 사진: pixabay)

우리 만남의 시작과 끝은 항상 밥이다. "식사하셨어요?"로 시작한 대화는 "다음에 밥 한 번 같이 먹자."로 마무리다. 굶고 사는 시대도 아니건만, 부러 간헐적 단식도 하는 세상에 식사 걱정이 이토록 난무하는 것은 밥이 가진 끼니 이상의 의미 때문이리라.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일이다. 공통의 관심사가 될만한 메뉴를 결정해 적당히 좁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30분 이상을 함께 해야 한다. 그 시간이 맛있는 식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파인다이닝이 필요한 건 아니다. 눈 맞추며 나누는 편안한 대화, 적당한 심적 거리, 소스처럼 오고 가는 위트. 식탁 위에 이런 몇 가지의 요소가 찬거리와 함께 얹어질 때 식사는 맛이 되고, 기억으로 남는다. 맛있고 편안한 식사를 함께 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시간일지 모른다.


음식과 함께 한 10여 개의 일화가 이야기가 되었다. 맛에 대해 쓴다 했지만 결국은 사람이었고, 애정이었으며 추억이었다. 생활은 때로 쓴맛을 주며, 눈물은 짠맛을, 사랑은 달콤함을 준다. 시고 짜고 떫은맛도 골고루 느끼며 우리네의 맛있는 이야기는 각자의 식탁 위에 이어질 것이다.


매 순간의 식사마다 최선을 다해 맛있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

우리 모두 누군가에겐 '밥맛 도는 사람'이기를 :)

- 맛세이 연재에 따뜻한 댓글로 맛있는 글을 완성해 주신 분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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