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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Feb 05. 2024

그리하여, 여전히 책방에 갑니다.

오르막길 책방의 VVIP

 (대문사진:pixabay)


- 여는 이야기

 햇볕이 내려 앉은 골목을 한 소녀가 걷고 있다. 등에는 쨍한 파란색의 베네통 가방을 짧게 당겨 메고서. 뛰는 것에 가까운 속도로 어디론가 황급히 향하고 있다. 소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꽤나 잰걸음이다. 시간으로 보아 하교를 하는 모양이다.


 어깨 즈음 오는 단발머리에, 안경에는 얇고 붉은 테를 둘렀다. 앞머리를 세워 드라이한 모양이다. 이마 위에 조스가 한 마리 섰다. 새하얀 아식스 운동화에, 총 천연색 발목 양말을 신었다. 백설기 위에 얹은 무지개떡 같달까. 작은 발이 앙증맞게 도로와 맞닿으며 콩콩 소리를 내고 있다.  


 양손으로 야무지게 가방끈을 조여 쥔 소녀가 골목을 지나 언덕길을 만났다. 소녀는 지칠 새라 다다다다 달리기 시작한다. 오르막을 얼마쯤 올랐을까. 작은 가게 하나가 보인다. 00 책방.  금속의 여닫이문을 찌그덩 열면, 문 위에 달린 쇠 종이 째그렁째그렁 소녀가 왔음을 알린다. 출입문 우측 곁에는 목재의 카운터가 있고, 손님이 오는 것에 무심한 듯 관심 없는 척 주인아저씨가 책에 눈을 두고 있다.


 소녀는 문에 들어서자 곧장 카운터로 달려간다.

"아저씨! 0000 7권 나왔어요? 오늘 나온다 하셨는데! 벌써 누가 빌려 갔어요?"

"어익후, 효나 왔나?" 

"네!! 제가 학교 마치자마자 청소도 후다닥 하고 떡볶이마저 포기하고 얼마나 달려왔는데요. 아직 안 나왔어요? 신간?" 

"짜잔. 내가 누꼬(누구냐). 네가 하도(너무) 사정을 하길래 오늘 들어온 신간 하나 카운터 밑에 꼬불쳐(숨겨) 뒀지!" 

"와아. 아저씨! 역시!! 감사합니다. 제가 금방 보고 안 늦게 갖고 올게요!"


 그렇다. 책방의 VVIP가 바로 나. 이효나였다. 뭐든 하나 빠지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인지라, 열심히도 갔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00 책방. 골목길을 걸어올 때부터 내 주머니에 찰랑대던 동전은 카운터에 올려진다. 신간은 300원, 덜 신간은 200원. 신간은 1박 2일, 구간은 2박 3일. 다소 야박한 대여기간이었지만 사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자고로 만화는 몰입감을 가지고 읽어야지.


(사진: pixabay)

 즐겨 가던 책방은 체감상 경사가 30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언덕에 있었는데, 장딴지가 알타리가 될지언정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만화책은 물론이거니와 하이틴 소설에 당대의 청소년 잡지까지. 엄마가 절대 자비로 사줄 리 없지만 절대적으로 읽고 싶은 책들이 '얼른 와, 너 지금 나를 안 빌려보고 뭐 하고 있어.' 유혹하는 보물창고였다.


 주로 대여한 책은 만화, 만화책, 만화류. 친구들은 학교 쉬는 시간, 내가 들려주는 신간 이야기를 좋아했다. 읽는 것보다 내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밌다니 신이 났다. "짜라란! 그래서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궁금하시면 00 책방에서 빌려보세요!" 쉬는 시간의 만화 만담꾼. 그게 나란 아이였다.


 나의 감수성을 키운 것은 8할이 동네 책방이요, 내 용돈의 9할을 가져간 곳 또한 그곳이다. 가끔 하루 이틀 연체가 되면 인심 좋은 사장 아저씨는 슬쩍 넘어가 주시기도 했는데, 아주머니는 칼 같이 연체료를 회수하셨다. 연체가 된 날은 문을 살모시 열어서 아저씨가 계신지, 아주머니가 계신지 확인부터 하는 꾀돌이 소녀. 그게 바로 나란 녀석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코끝에 강하게 부딪히는 만화책의 종이 (정확히는 갱지) 냄새. 만화책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소설책도 좀 빌려볼까 소설책 내음 킁킁 맡아보지만, 이내 만화책 코너로 돌아가 한 아름 빌려 들고 집으로 오곤 했다.


 엄마 퇴근 전까지 읽어야 한다. 촌각을 아껴 효나리. 책가방을 거실 소파에 던져두고 바로 읽기에 돌입한다.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 내 방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책상 위에서 안네의 일기랄까, 삼국지랄까. 이도저도 아니면 브리테니커랄까. 그런 책들을 읽고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그전까지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몰입감과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 너무 재미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읽는다.      

 '아, 내일도 집에 오는 길에 책방에 들러야지! 무슨 재미난 책이 있을까! 얼른 내일이 왔으면.'

 

슬램덩크. 나는 강백호파였다.

 그렇게 섭렵한 책들. 셀 수도 없다. 윙크, 챔프부터 시작해서 꽃보다 남자, 풀하우스, 베르사유의 장미로 가슴 설레고 슬램덩크로 밤잠을 설쳤다.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등등. 친구들과 쉬는 시간이면 신나게 떠들어댔던 추억이 몽글하다.  


 어느 날부턴가 동네 책방과 비디오 대여점이 점점 규모를 줄이더니, 하나 둘 폐업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스러져간 것은 내가 사랑한 오르막 책방이었다. 어디로 가신다는 말도 없이 문을 닫아 버렸다. 아쉬웠던 그날. 사장님이 선물로 주셨던 만화책은 어디로 갔을까. 어느 날 그마저도 사라졌나 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지만 책방만큼은 영원하길 바랐는데, 추억만을 남기고 어린 날의 아지트가 사라졌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등성이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나에게 작은 책방은 무조건적인 향수로 남았다. 


 그때 만약 내가 만화책이 아닌 역사책을 탐독했거나, 수학이 너무 좋아 난리를 부렸거나, 백과사전을 품에 안고 살았다면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소셜 포지션이 좀 높아졌을지도. 하지만 당시의 그 만화책에 설레던 꼬마 소녀의 모습이 밉지는 않다.


 그때부터였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이 말이다. 만화책에서 시작된 책 사랑은 소설책으로, 역사책으로, 인문 철학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넓힐 수 있었다. 책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좋았고, 즐거웠다. 책에 대한 친근함과 독서 습관을 키운 건 작디작은 책방에서의 시간이었다.  


 코딱지만 한 책방이든, 드넓은 대형 서점이든 책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건 단순히 어릴 적의 향수 때문일까. 서점과 책방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 있어서겠지. 끝나지 않을 책방 사랑, 그리하여 여전히 이어진다고 한다. 나보다도 책을 더 사랑하는 아이가 따라나서기도 하고, 세 살 배기가 함께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또 책방과의 추억 쌓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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