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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미 Oct 22. 2021

09. 기다립니다, 기대합니다.


 내가 속한 조직은 땡땡그룹(*가칭)의 인사, 교육 헤드쿼터로, 땡땡그룹에 속한 수 십 개 계열사의 인사, 교육의 방향을 총괄하는 부서였는데 복직 후 처음으로 내게 맡겨진 업무는 전 계열사 육아휴직자들의 복직률을 높이는 일이었다. 이 업무지시가 있었던 배경은 육아휴직을 간 직원들이 때가 되면 회사에 돌아올 줄 알았더니 예상과 다르게 휴직 후에 바로 퇴사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니 나야말로 복직 직후에 똥오줌 못 가리고 있는데, 사무실 내선 번호도 헷갈리는 판에 누가 누굴 돕습니까?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부서에 육아휴직 경험자가 나밖에 없었고. 사무실 내 동료들은 대부분 싱글이거나 딩크족으로, 앞으로도 육아휴직을 쓸 계획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서 그 일은 자연스레 내게 맡겨졌다. 


맡고 보니 이 일이 복직 후 첫 업무인 게 다행이다 싶었다. 나 역시 복직 후에 겉으론 아무 일 없는 듯이 출근을 하면서도, 마음속은 일을 해? 말아? 심리적으로 갈팡질팡 하는 상태였으므로 스스로에게도 동기부여가 되리라 생각했다. 이 일을 잘한다고 해서 조직의 주목을 받거나 성과를 인정받을 것 같진 않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의 동지들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바랐고 잘 해내고 싶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지들에게 전단을 보낸다는 느낌으로 복직 한 달 전에 육아휴직자의 집으로 사내 도서를 만들어 발송하는 것이었다. 웬 책이야? 싶겠지만. 일단 회사를 나와야 복직 후에 적응을 말할 수 있으므로 회사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했는데. 문자는 너무 성의 없고, 집집마다 자필편지를 보낼 수도 없고. 나는 대체로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 하고 싶은 말, 필요한 말 엮어보니 책 한 권 분량이었다. 자기 인생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 하는 사람 많은데, 나는 실제로 책으로 해버리는 편이랄까.  


내가 복직하기 직전을 떠올려 보니 그랬다. 복직 시점이 다가오니 대리 양육자도 구해야 하고, 일 년 간 레깅스나 트레이닝복만 입느라 처박아 둔 펜슬 스커트가 골반에 들어가는지 꿰입어 봐야 하고, 아이에게 엄마가 곧 일을 하러 나간다는 것을 대충이라도 설득하고 적응시켜야 하고, 복직원을 제출해야 하는 등등 내 일신상의 문제를 정돈하기도 골이 아팠는데. 


무엇보다 일 년 간 자리를 비웠던 나를 과연 회사가 반겨줄까? 그간에 해오던 업무가 아닌 생소한 업무를 맡아서 제 역할을 못한다거나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심리적인 부담이 가장 컸다. 그 사이 부서장도 바뀌었다 하고, 일부 조직개편도 있고. 일 년 간 젖 먹이고 똥 치운 나와는 다르게 흘러간 세계에 다시 합류하려니 마치 합이 잘 맞는 단체 줄넘기에 나 혼자 불쑥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쌩쌩 돌아가는 줄넘기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하고 넘어지면 모두 싸늘한 시선으로 주목할 것만 같은 두려움. 


그래서 생각한 것이 '회사가 당신을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릴 줄 몰랐지?' 메시지를 보내면 어떨까 했다. 어색한 자리에 갈까 말까 망설일 때 친구가 옆에 툭 치면서 "야! 가자~ 니가 가야 재밌지" 한 마디 해주면 옆구리 찔러준 친구 봐서라도 가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지 않나.(귀 얇은 나만 그런가?) 사실은 가고 싶었던 내 마음도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책 제목은 "기다립니다. 기대합니다". 회사가 당신의 복직을 기다리고, 당신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메시지가 주를 이루고 복직 전에 준비해야 할 일과 복직 후 회사에 제출해야 할 서류 등 실용적인 내용으로 정리했다. 이 책을 받고 자신이 히어로인 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작전에 합류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피가 도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커리어우먼의 피가 돌기를! 


복직이 임박한 직원들의 집에 책을 보내면서, 안 그래도 복직 준비에 정신없는데 회사에서 온 책이라니. 더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을 여유나 있을까? 등등 걱정이 많았는데 책 한 권 때문에 돌아온 것은 아니겠지만 복직한 분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줬다는 메시지는 꽤 받았다. 바로 그 시점이었다. 내 정신도 돌아온 것이. 


인사담당자로서 '육아휴직자의 복직률을 높여라'라는 업무를 받았지만 정작 내 마음도 매일 회사를 다녀? 말어? 하고 있는 판이었는데. 서로 이름도 모르고 살던 육아휴직 동료들의 따뜻한 반응이 나를 복직시켰다. 우치다 다쓰루 선생이 말했던가, 세상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내 집 앞을 깨끗하게 쓰는 일은 가능하다고. 입신양명의 꿈은 없지만, 나의 복직이 나와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의 복직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 업무를 지속하고 싶었다. 세상 어딘가에서 애가 저지레 한 밥그릇을 치우며 복직을 망설이는 동료에게 모스부호를 보내는 느낌으로. 용사들이여, 전장으로 돌아오라! 따따따 따 따따 따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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