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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미 Oct 22. 2021

11. 비밀 연차

TV 드라마나 영화가 그려내는 워킹맘은 21세기형 서편제가 따로 없다. 다들 가슴속에 한이 많고,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눈물바람. 하이힐을 신고 정장을 입은 엄마가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흐느끼는 것은 거의 정해진 클리셰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겠다는 열망에 미쳐서 비정한 엄마. 양자택일뿐이다. 일에 미치거나 슬프거나. 그러나 현실의 워킹맘이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출근이 휴식이 될 때도 있다. (훗)


주말에 아이와 하루 종일 부대끼며 점심엔 뭘 먹이지 고민하고 돌아서서 저녁엔 뭘 먹이지? 같은 고민을 돌림노래처럼 하다 보면 차라리 회사에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회사에선 적어도 내 몫의 책상에서 혼자 커피를 음미하며 마실 수 있으니까. 직원식당 영양사께서 뭘 먹을지 나 대신 고민해서 정해진 시간에 딱딱 내주니까. 

동요나 애니메이션 소리를 BGM으로 하지 않고 조용히 마시는 모닝커피, 출퇴근 길에 이어폰으로 듣는 발라드(제발 동요는 그만!!), 법인카드로 사 먹는 디저트도 가끔 힐링 포인트가 되지만 무엇보다 나의 길티 플레저는 비밀 연차다. 회사에는 연차를 내고, 집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것.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이와 주말 외출을 하면 항상 붐비는 곳을 쫓기듯 다니게 되니까 평일에 연차를 내고 비교적 한산한 때 놀이동산이라도 갈까 싶은 내적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깐의 죄책감에 넘어가선 안 된다. 시작은 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보낼 좋은 마음이겠지만 그 끝은 반드시 내 안에 화가 솟구치게 되어 있다. 오롯이 나를 위한, 으른의 자유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 8시간짜리 연차에 대단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출근하듯 나와서 광화문, 종로, 여의도 등 직장인이 많은 지역 사거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반드시 출근 인파가 붐비는 곳이어야 한다. 내가 출근을 할 때는 마음이 바빠 옆도 뒤도 보이지 않는데, 그 시간에서 빠져나와 구경꾼으로 보는 도시의 아침은 어찌나 활기찬지! 오전 시간을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책 보며, 핸드폰 붙잡고 SNS를 실컷 구경하며 보낸다. 


점심엔 줄이 길어서 도전하기 어려웠던 맛집을 가거나 아이와 함께 가기 어려웠던 메뉴를 택한다. 이제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웬만한 식당에는 동행이 가능하지만 아이가 어릴 땐 키즈 메뉴가 없는 식당, 가령 순대국밥이나 매운 낙지볶음, 포장마차 음식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막상 해보면 별 것도 아니고, 먹어봐야 내가 아는 맛이지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 생각하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근사한 기분을 내고 싶을 땐 마치 중요한 회의가 있는 것처럼 차려 입고 브런치 집을 가기도 하고, 초밥 오마카세를 먹기도 한다. 일 인분의 사치가 좋다. 남편도 거추장스럽다. 프로그램은 무궁무진하다. 사우나에 가서 세신을 받기도 하고 네일아트를 하기도 한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를 보기도 하고(이혼하는 내용의 영화를 보면 몰입도가 높다.) 교외 아웃렛에 가서 쇼핑을 하기도 한다. (내 것을 사러 가서 아이 옷만 잔뜩 사 가지고 올 때가 많지만.) 그러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가 있다. 일하는 8시간은 길게 느껴지는데 놀면서 보내면 얼마나 쏜살같은지.


 혼자 야금야금 놀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가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과 혼자 놀면서 채워진 좋은 기분이 시너지를 내서 저녁시간에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게 된다. 같은 동화책을 열 번씩 읽어서 목소리가 갈라져도 좀처럼 화가 올라오지 않는다. 그러니 거짓말을 했지만 윈윈 아닌가. 


일과 육아 틈에 치여 살다 나도 사람같이 살아보겠다고 비밀 연차를 만들었지만 다른 분께도 유사한 조언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은 알만한 기업의 임원이 되셨는데, 부장일 당시 가끔 육아 상담을 해주던 선배께서 워킹맘 오래 하려면 자유시간 메뉴판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게 생각난다. 그분께선 30분, 1시간, 반나절, 하루. 자유시간의 범위에 따라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하셨다. 30분 자유시간엔 카페에서 독서, 1~2시간엔 네일아트, 반나절엔 사우나 혹은 운동. 하룻밤은 혼자만의 호텔 스테이. 


갑자기 자유시간이 생기면 들뜬 마음에 뭘 할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다 버린다며, 갈팡질팡 하는 그 시간조차도 아까우니 자유시간 메뉴판을 만들어 보라는 조언이었다. 나는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자유시간을 즐기는 편이지만 어떤 방법이든 간에 워킹맘에겐 비밀 연차가 필요하다. 물론 전업주부도 마찬가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에 치여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때. 한 달에 한 번쯤은 없는 제사라도 만들거나 (나 혼자 하는) 학부모 상담일정을 만들어서 아이를 제삼자에게 맡기고 자유시간을 즐겨보는 게 어떨까. 나와 아이, 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 모두의 평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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