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개미 Oct 24. 2021

15. 혹시 임신해보셨쎄여?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을 하니 회사에서 '애는 누구한테 맡기고 오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처음엔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려 건네는 스몰토크, 선의,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건 돌리기처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어제 이미 답했는데 오늘 또 물어보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물어보니, 반복되는 질문만으로 사무실에서 애엄마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회사에서 사적인 대화를 지나치게 하면 전문성이 없다 어쩐다 하면서 나한테는 왜 육아 이야기만 줄곧 하는 건지. 기껏 일하러 왔더니 회사에서도 육아인 취급이다. 내가 한 사람의 업계 동료로, 직장인으로 회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엄마가 주업이고 직장은 부업, 취미로 나왔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 내가 누구한테라도 애를 맡겼으니 출근을 하지 않았을까요? 애 맡길 데가 없으면 어떻게, 이제라도 회사에 애를 데려와도 될까요? 해결해주지도 못할 문제를 이렇게까지 반복적으로 묻는 건 정말 궁금해서가 아니라 hoxy '육아휴직을 하고 왔으니 회사에서 니 사정을 봐주고 있는 중이야'라는 시그널을 주고 싶으신 거 아닐까요?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으시다면 직장 어린이집 TO라도 알아봐 주시거나, 출퇴근 시간에 유연성을 주거나 회식 참석 자율권 정도라도 주시면 좋을 텐데. 


뿐만 아니다. 나보다 직급이 높은 남자 상사들이 '우리 와이프가 임신했을 때' '내가 애를 키워봤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업무 훈계도 잘못하면 꼰대 소리 듣는 세상에 회사에서 육아 훈계라니.    


A 팀장 : "우리 땐 육아휴직이 어딨어(임신 안 해봤으면 우리라고 엮지 마세요), 와이프가 낳고 출산휴가 석 달도 다 못쓰고 복직했잖아. 그래도 못 버티고 결국 회사에서 나왔지. 아까워."


B 팀장 : "우리 와이프도 좀 버티다가 애 공부에 집중시키려고 8살 때 그만뒀잖아. 괜찮은 직장 다녀도 애 하나 잘 키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결국 초등학교 가면 그만두더라니까. 학원 라이딩만 해도 보통 바쁜 게 아니거든."

 

A팀장 : "(갑자기 날 보며) 근데 그래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지가 알아서 다 하더라고? 우리 와이프는 애가 딱! 3학년 되니까 그만둔 거 후회하더라고. 


현 워킹맘의 마음속 :.........오쪼라고요.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이 뭘까요? (마른 세수) 


남자 상사들이 임신과 육아, 육아휴직 후 복직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 그 자리에서 은은한 미소를 띠며 듣고 있으면 대충 좀 그만들 좀 해달란 뜻이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군대를 겪은 적 없는 여성이 현역 복무자 앞에서 "우롸부지가 군대 갔을 때는요" "내 남편이 군생활할 때요"로 시작되는 간접 경험담을 반복적으로 하면 기분이 어떨지. (예... 바로 그 기분입니다.)


맨스플레인 이란 말이 있다. 남자(mans)와 설명하다(explain)을 합친 단어로 어느 분야에 대해 여성들은 잘 모를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진 남성들이 잘 아는 척 설명하는 것을 풍자하고 비꼬는 용어다. 그런데 맨스플레인을 해도 입을 댈 곳에 해야지, 아니 임신 출산을 막 마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혼을 빼는 나한테 육아 훈계를 하다니. 임신해보셨쎄여? 애 낳아 보셨쎄여? 


노임신피플이면서 나를 붙잡고 육아 이야기를 하는 또 다른 유형은 본인 어머니의 애환을 나한테 말하는 상사다. 우리 어머니 날 키울 때 그리 고생했다고 영웅 설화처럼, 판소리 한의 대목처럼 이야기하면서 지금 누군가의 어머니로 고생하는 부하직원(=나)에겐 조금의 배려도 없다. 현재 누군가의 어머니를 배려하지 않으면서 주구장창 자신의 설화만 반복하면, 그 설화가 지랄염병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을 모르겠지. 


부하직원의 아이가 자라서 그 옛날 우리 어머니가 일과 돌봄 노동을 병행하실 때 의로운 두목처럼 우리 어머니를 도와주신 상사분이 있었다지, 새로운 제도와 길을 개척하신 의로운 분. 이렇게 미래의 설화에 자신이 영웅으로 등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걸까. 


그뿐이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임신한 직원이 야근이 어렵거나 단축근무를 하면 '아 옛날엔 다 밭에서 일하다가 애 낳고 그러지 않았음?'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릴한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hoxy 밭에서 애 낳아보셨나요?) 특히 나를 붙잡고 '정책임 임신했을 때만 해도 이런 거 없었잖아. 아이 우리 땐 뭐 그냥 다 일했지' 하며 농담이랍시고 나를 끌어들인다. 네, 네 임신하고도 아침마다 커피 마시고 제때 출근하고, 임신해서 졸려서 미칠 것 같을 때 누가 볼세라 점심시간에 지하주차장 차 안에서 쪽잠 자고, 배 불러서 야근하고 그랬죠. 그렇지만,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나요? 애 낳은 사람 중에 임신 출산 관련 구석기시대 농담 듣고 네? 하면서 못 들은 척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못 들은 게 아니라 안 들리는 척했을 확률이 높다. 


사무실에 굳건히 자리 지키며 야근까지 해도 제대로 일 하지 않고, 저녁값으로 법인카드만 축내고, 업무시간에 멀고 먼 흡연구역까지 담배 피우러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많은데. 임신해서 단축근무를 하거나 육아휴직을 다녀오면 큰 혜택이라도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임신하면 똥밭에 덜 구르는 것 같아서 배 아픈 걸까? 정말이지 다들 임신 좀 해봤으면.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나는 회사에 애엄마 자격으로 나간 게 아니니까. 애를 누구한테 맡길지, 어떻게 기를지, 그래서 회사를 계속 다닐지 말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임신해 보지도 않은 분들의 훈계는 듣고 싶지 않네요. 제게 필요한 건 훈계보다는 제도입니다. 에 그리고 임신 출산 관련 제도가 혜택으로만 느껴진다면 제발 임신 한 번만 해보세요. 네? 

이상입니다. 



 






이전 12화 14. 성격차이 보다 커진 경력차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