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개미 Oct 24. 2021

16. 점심시간에 즉떡을 먹는 행복

직장생활을 해서 좋은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자기 계발, 자아실현 뭐, 이렇게 수능 1등 한 사람이 국영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식으로 허황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행복은 아주 사소한 곳에 있다. 점심시간에 마음이 맞는 여성 동료들과 킬킬대며 즉석 떡볶이를 먹는 것이 직장생활의 큰 기쁨이다.  


허겁지겁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물도 한 잔 못 먹고 일에 집중하는 날도 있지만. 출근하자마자 점심 메뉴를 사내 메신저로 상의하는 날도 있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숙취여부에 따라 쌀국수를 먹을 때도 있고 차돌 된장찌개를 먹을 때도 있지만 누군가 함께 상의할 일이 있다거나, 유난히 동료들에게 푸념을 하고 싶을 때 사내 메신저에 "오늘 떡볶이 먹을래?" 한 마디면 대화창은 하나 되고 파티션 너머 보이는 동료의 정수리에서도 신난 게 보인다. 누군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만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전원 찬성을 외치게 되는 한국 여성의 힐링푸드랄까. 


1분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직장인의 점심시간. 오피스가 밀집된 곳에 근처 떡볶이집은 점심시간마다 만석인데다 점심시간이 임박하면 사내 엘리베이터가 층층이 체증을 일으키기 때문에 떡볶이를 먹기로 한 날은 나름대로 비장하다. 점심시간 20분 전부터 드릉드릉 마음속에 시동을 걸고, 전력질주로 엘리베이터를 잡아 탄 후 떡볶이집 대기줄에 서지 않고 바로 착석할 수 있게끔, 각자가 아는 샛길 정보를 총동원해서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를 경보 속도로 내달린다. 때로 점심시간에 임박해서 팀장님이 말이라도 걸어오면, 선발대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다. 


선발대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든, 다 같이 전력질주를 하든. 안정적으로 자리에 앉은 후에는 작은 행복이 펼쳐진다. 보글보글 끓는 즉석떡볶이 앞에서는 사업계획이고 경영전략이고 간에 사리를 언제 넣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 아무리 심각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꼬들한 면 좋아하는 책임님은 지금 사리를 건지세요! 지금입니다!” 후배의 절도 있는 가이드로 각자 기호에 맞게 사리와 떡볶이를 퍼먹고, 남은 국물에 밥도 볶아먹고. "너희 팀장님 오늘 왜 그리 까칠하시니?" 사내 근황 토크부터 "유튜브에 이거 정말 재밌는데 알아요?" "이 옷 얼마 게? 대박 쌈" 트렌드 공유까지. 


맛있고 배부르게 떡볶이를 먹고, 손에 커피를 하나씩 들고, 업무시간에 늦지 않게 총총 걸어오면 그날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근무 만족도 별 다섯 개! 사리를 풀옵션으로 넣고, 떡볶이 정도는 실컷 먹을 만큼 돈을 버는 나 자신이 대견하다. 직장생활 십n년 차가 할 말인가 싶지만 사실 이 맛에 회사를 다닌 달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신입사원 젊은이가 내게 직장생활의 도리에 대해 물어온다면 내가 해 줄 조언은 이렇다. 동료와 즉석떡볶이를 먹게 된다면, 아무리 중차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사리를 건질 타이밍에 절도 있게 대화를 끊어내야 한다. 우물쭈물해서 면사리가 불어 버리면 낭패! 모두가 순대나 튀김을 시킬지 말지 고민할 때는 주도적으로 시키도록 하세요. 

이전 13화 15. 혹시 임신해보셨쎄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