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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미 Oct 23. 2021

12. 노키즈존 유감

 아이와 단둘이 식당에 갈 때, 아이가 어른 몫의 1인분을 다 먹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1인분을 더 시킨다. 1인 1 메뉴를 주문하라는 안내가 없어도 무조건 그렇게 한다. 음식을 남기더라도 아이도 온당한 1인분의 서비스를 받게 하려는 나의 셈법이다. 아이와 단 둘이 식당에 들어섰을 때 매장에 먼저 앉은 손님들 중 어린이가 없으면 혹시 노키즈존 식당인 것을 모르고 눈치 없이 들어온 건 아닌지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그나마 아이가 '노키즈존'이란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어렸을 땐 수월했다. 거절과 수모는 나만 당하면 되니까. 불행하게도 노키즈존은 사라지지 않고, 아이는 노키즈존이 무엇인지 아는 어린이가 되었다. 


제주도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주도는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라서 비교적 자주 가는 곳이지만 유난히 노키즈존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카페나 어린이 전용 메뉴가 따로 있는 식당 몇 군데는 알아두고 있다. 동시에 노키즈존도 미리 알아두고 거르는 편인데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9세 미만 어린이를 동반하면 매장은 이용할 수 없고, 포장만 가능하다는 유명 카페에 들렀다. 


인기 있는 곳이라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카페 안은 이미 대단히 혼잡했다. 카페인지 도떼기시장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다들 언성 높여 대화를 하고 있었고, 말소리에 묻혀 음악은 애초에 들리지 않았다. 주문하는 줄도 길었다. 주문 대기줄에서 기다리는 동안 디저트 쇼케이스에 몇 개 남지 않은 파운드케이크를 커피와 함께 포장할 것인지, 커피만 포장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내 차례가 되었다. 


주문을 받던 점원은 내가 줄에 서 있을 때부터 앞쪽 손님들에게 반복적으로 "포장하시겠어요? 자리 잡으셨어요?"라고 물었는데, 내가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녹음한 듯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아이를 보고서도 "자리 잡으셨어요?" 묻기에, 운영 정책이 바뀌었나 싶어서 "아이와 함께 이용할 수 있나요?"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제야 카운터 아래에 적힌 안내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외친다. "9세 미만은 포장만 가능하세요!" 그리곤 대답할 새도 없이 곧장 아이에게 묻는다. "너 몇 살이야?" 글을 읽을 수 있는 8살 아이는 죄를 심판받는 사람처럼 서서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나도 얼어붙었다. 9살 미만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이야길 하면서 그 또래쯤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나이를 말해 보란다. 노키즈존이란 안내표지를 카운터 앞에 와서야 볼 수 있게, 아이들 눈높이에 붙여 두고서. '내가 미쳤지. 커피가 뭐라고! 그깟 크림 들어간 커피 따위. 그게 뭐라고 애를 데리고 줄까지 서가며 먹으려 했나.' 자책이 되고 화도 났다. 


큰 소리로 따지고 싶었다. 노키즈존을 할 거면 문 입구에 부모 눈높이에 안내를 붙여 두던가. 그 또래 아이 데리고 들어온 사람한테는 애초에 앉을 거냐고 묻질 말던가. 애한테 몇 살 이냐고 물어서 9살 미만이면 나가라고 할 참이었냐고 큰 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내버리면 아이가 주목당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없이 돌아 나왔다. 점원은 내 다음 손님에게 또 기계적으로 물었다. "포장하시겠어요? 자리 잡으셨어요?"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노키즈존인줄 모르고 아이와 함께 가서 문전박대당한 썰은 많이 들었지만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요리조리 잘 피해왔다. 내가 수모를 당하지 않아서 다행스러웠던 것이 아니다. 내 아이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어린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차별행위를 당연한 듯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아이를 둘러싼 주위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눈 가리고 아웅 이었다. 


카페에서 나온 아이가 내게 미안한 기색으로 "나 때문에 엄마 좋아하는 커피 못 마신 거 아냐?"라고 시무룩하게 이야길 했다. 작은 일에 또 가슴이 무너졌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왜 커피 한 잔 마시는 일에도 번번이 가슴이 무너져야 하는지. 생각 같아선 누아르 영화처럼 쌍권총 뽑아 들고 돌아가서 허공에 총이라도 빵 쏘고 싶었지만 아이에게는 궁여지책으로 "어린이를 곤란하게 하는 카페인데 커피가 맛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그냥 나왔어."라고 답을 했다. 


노키즈존을 문제 삼으면 항상 따라오는 말이 있다. 선심 쓰듯이 '모든 엄마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란 전제를 달고 일부 몰지각한 엄마들이 문제라서 불가피하다고. 대체 그게 언제 어디서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식탁 위에 똥기저귀를 놓고 간' 에피소드나 '식당에서 똥기저귀 간 일화' 등등이 소환된다. 똥기저귀가 문제면 똥기저귀 처리 방식을 논의하면 된다. 


아이를 낳고부턴 대형 쇼핑몰을 주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린이 전용 공간이나 수유실, 기저귀를 갈 수 있는 시설, 화장실이 가장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저귀를 갈 곳이 있다면 굳이 식당에서 기저귀를 갈게 되었을까, 공공시설에 기저귀를 갈 곳이 충분 한가부터 생각해 볼 일이다. 일부 몰지각한 어머니들이 문제라면 몰지각한 성인을 붙잡고 항의하면 된다. 왜 그 해결방안이 전체 어린이를 거절하는 방식이어야 할까. 


가령 외국식당을 갔는데 "No korean"이라고 입구에 써붙여 놓고, 거절한다고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은 들어갈 수 없냐고 묻자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이 있어서, 혹은 다른 이용객들이 한국인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답변을 한다면 우리 모두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제로 노키즈존 이전에 노여자존, 노흑인존이 있었다. 그 시절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답이 된다고 생각한다. 피 흘리며 싸운 대가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나 싶었더니 노키즈존이 나타났다! 어른은 이유를 따져 물을 수나 있지. 아이들은 항의할 수도 없고, 일방적으로 거절을 당할 수밖에 없는 약자 오브 약자라서 더욱 폭력적이고 야비한 방식이다.  


모든 장소에 무조건 어린이를 허락하는 것도 아니다. "루프탑은 위험하니 어린이는 일부 층만 이용이 가능합니다."라고 안전상의 이유로 제한하는 경우엔 기어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 거다. 집중이 필요한 클래식 공연에, 술집에, 클럽에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게 아니지 않나. 노키즈존은 대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름부터가 틀렸다. No 뒤에 붙는 단어는 해악을 끼치는 물체 혹은 최소한 가치중립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된다. 노 담배라든가, 노 알코올, 노터치 등등. 어떻게 사람 앞에 No를 붙일 생각을 했을까. 


매너와 예의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기대치가 높아졌다면 편의시설이나 공공장소에 대한 수준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렸을 때 시도 때도 없이 똥을 싼다. 21세기가 되었다고 기저귀를 갈 만한지, 장소 봐가며 똥을 싸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곳을 더 늘이고, 공공장소의 매너를 좀 더 보편화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지, '똥기저귀 갈아야 하는 어린이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마세요'가 최선은 아닐 것이다.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입장에선 업주가 일부 소비자층을 포기하고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니 어떻게 하든 주인 마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또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면서 '맘충 케이스'를 줄줄이 열거하며 노키즈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경우도 봤다. 물론 사장 마음대로 운영할 자유가 있다. 성인 전용 공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노키즈존이라 팻말 붙이고 어린이를 기피하는 게 근본적인 해결방법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차별을 전시하고, 또 그 대상이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다음 약자를 찾아 '노어르신존'이 생길 것이다. 


'맘충', '노키즈존'이란 단어가 존재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기르는 일은 조심스럽다. 내가 맘충이 아닌지 살펴야 하고, 내 아이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나도 모르게 높아진다. 미혼남녀도, 청소년도, 할저씨, 할줌마도 다들 카페에서 소리 높여 떠들고 있는데, 미취학 아동들은 잠깐이라도 울고 보채거나 음료수를 흘려선 안된다. 그러면 노키즈존이 되니까! 어린이의 울음소리, 어린이의 미숙함을 이토록 수용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출산율을 걱정하다니. 이런 환경에선 아예 어린이들이 소멸해버려야 윤리적으로도, 인과적으로도 지당한 결론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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