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개미 Oct 16. 2021

05. 애 좀 키우고 오겠습니다.

1년 간의 육아휴직

 아이를 낳을 운명이었는지 불임 소리를 듣고 돌아서자마자 아이가 덜컥 들어서더니. 출산 시기가 다가오고 육아휴직을 언제 말씀드려야 하나 슬슬 고민이 시작될 때쯤, 회사에서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라는 것이 생겼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성들이 일하기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법이 보장하는 3개월의 출산휴가 이후에 1년의 육아휴직을 의무적으로 사용하게끔 한 사내 제도이다. 그렇잖아도 출산휴가 후에 육아휴직 기간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하나, 상사에게 어떻게 입을 떼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회사가 일 년 동안 육아휴직을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물론 나는 이 제도가 가장 반가운 입장이었지만 일말의 의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 이렇게 파격적인 인사 제도는 없었기 때문에 막상 휴직원을 내자니 망설여졌다. 회사에 대한 나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 주니어 꼰대로서 회사가 애 키우고 오라고 해도 "아닙니다! 무슨 소리예요! 일하다가 애 낳고 싶은 걸요? 출산휴가 석 달도 제게는 너무 기네요!"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회사 내에 많은 제도들이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다가도 그 제도의 혜택을 입은 실수요자는 없는 경우가 많다. 이 제도 역시 신문이며 뉴스에 대외 홍보는 대대적으로 하지만, 결국 아무도 본 적 없는 유니콘 같은 것으로 남고 실행은 지지부진한 것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도 나의 우려와 달리 이 제도는 직원들이 건의한 것이 아니라 회장의 지시사항이었기 때문에 제도의 내용도, 진행속도도 공격적으로 추진됐다. 더구나 나는 인사, 교육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소속이라 새로 도입되는 제도라면 시범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니 이건 뭐, 회장님과 나의 크레이지 텔레파시랄까.


그러나! 나는 또 의심했다. 직장생활이란 것은 나한테 득이 되는 걸 덥석, 순진하게 받아들여선 안되니까. 듣기 좋은 지시는 회장이 해도 휴가원에 사인을 하는 사람은 바로 위 상사인데. 팀장이 내 휴직원에 사인하는지 안 하는지 회장이 어떻게 알 것인가. 매번 텔레파시를 보낼 순 없잖아. 그렇지만 이 제도를 만든 나의 동료, 실무자들 역시 나처럼 때 묻은 인간들이었다. 마치 이런 의심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꼼꼼하게 제도를 설계했다.



육아휴직을 어떻게 의무화하느냐. 아이를 낳으면 법적으로 3개월의 출산휴가는 보장되고, 직장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그 이후 1년간의 (유급) 육아휴직은 개인의 선택이다. 그런데 3개월의 출산휴가가 끝나갈 시점에 추가로 휴직원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애 낳으러 떠날 때 육아휴직 서류까지 한 번에 접수를 하도록 절차를 만들었다. 부하직원이 출산휴가를 떠나면서 휴직원을 함께 내지 않으면 해당 팀의 팀장 또는 부서장이 직접 사유서를 내야 한다. 적어도 상사가 눈치를 줘서 육아휴직을 못쓰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의미였다. 육아휴직 못쓰게 하면 당신이 가장 번거로워질 것이라는 팀장, 부서장들에 대한 은근한 압박이기도 했다. 또 출산 후 육아휴직 도중에 조기 복직을 하는 경우에도 사유서를 제출해야 했다. 스스로 개인적인 사유서를 내고 복직을 하는 경우는 허용이 되지만 급한 프로젝트에 충원을 해야 하는 등의 업무상 이유는 반려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조치로 그룹의 인사총괄 부서에서 계열사 간에 육아휴직 시행률을 계열사 사장의 리더십 평가항목으로 활용했다. 

(*10년 전이라 내가 다니던 00그룹엔 그룹 총괄 인사 부서가 따로 있었음)


 육아휴직을 안 쓰는 게 쓰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절차가 되어 버리고, 굳이 조기 복직을 시킨다면 왜 회사에 나와야 하는지 부서장이 직접 증명해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 더구나 부하직원의 육아휴직 사용 여부가 부서장을 비롯해 사장의 리더십 평가 항목에도 포함되자 혹시 회사가 우리를 단체로 시험에 들게 한 건 아닌지 의심했던 계열사들도 모두 시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출산을 앞둔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아이를 낳는 게 회사에 큰 민폐나 되는 듯이 눈치 보고 쭈뼛거리지 않고 '회사가 이렇게까지 가라고 등을 떠미는데, 안 가면 부서장님이 귀찮아진다는데! 감히 제가,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만 총총. 한결 가볍게 회사 문을 나올 수 있었다. 


이 경험으로 나는 눈치 보지 않고 일 년 간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서화, 제도화의 힘을 알게 됐다. 육아휴직 쓰세요, 쓰셔야죠, 두 번 쓰세요, 말로만 권장해서는 회사 분위기가 바뀌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일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할 만 한데. 그래 봤자 회사에선 '개인 사유' 일 뿐이므로. 그 당시만 해도 휴직기간을 있는 대로 쓰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의 차이를 모르는 상사도 있어서 '아니 3개월 쉬는 건 알겠는데 1년이나 더?' 이런 소리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나 역시 '법이 보장하는 육아휴직기간이 1년이라고 1년을 다 쓰면 눈치 없는 거겠지? 그냥 6개월만 쓸까?'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마감세일하듯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스스로 후려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갈등을 제도적으로 정리해 주는 게 큰 효력이 있었다. 회사가 웃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라가 정한 법을 법대로 하라는 것뿐이었는데도 무척 고마웠다. 많은 여성들이 육아휴직을 끝마칠 때가 아니라 출산휴가의 순간부터 이미 마음속으로는 저 멀리, 육아휴직 후에 복직할 걱정까지 당겨서 한다. 애 낳으러 떠나면서 '나는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모두가 동등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되고 나니 혼자 혜택을 받는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감정 낭비가 줄어들고 오히려 반드시 돌아온다는 마음으로 남은 업무를 정리했다. 육아휴직 일 년이 자연스럽게 보장된 그때야 말로 회사에 대한 나의 자긍심이랄까. 충성심이란 것이 생겼던 것 같다. 배부른 나 안 붙잡고 이렇게 쿨하게 보내주시니 나도 휴직을 마치면 돌아오겠어! 그게 상도의니까. 


이름부터가 매우 공격적인 육아휴직 '의무화' 제도는 처음에는 나처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많았고, '얼마나 가겠냐'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지치지 않고 꾸준히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해서 기어이 자리 잡았다. 내 이후에는 팀내 출산을 하는 동료가 생기면 으레 육아휴직 후에 돌아오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의 혜택은 육아휴직을 가는 당사자를 향한 것 같지만 거짓말처럼 여성 근무자 전체에게 희망처럼 가닿았다. 내가 현재 미혼이어도, 임신을 하지 않았어도 여성근로자가 가진 잠재적인 불안 하나가 없어진 셈이다. 


 이러한 제도가 나온 것이 십 년 전이다. 물론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고 내가 회사에서 받은 복지 중에 가장 큰 혜택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수준인 것은 아니겠지? 아니어야 할텐데. 법에서 보장한 육아휴직제도를 반드시 쓰라는 사내 제도까지 만들면서까지 이중 압박을 해야만 육아휴직을 가는 현실이 개선되었기를 바란다. 

이전 07화 08. 새벽 두 시에 약밥을 만드는 기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