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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미 Oct 20. 2021

07. 원하고 원망하죠, 친정엄마 육아

 일하는 여성이 아이를 낳고 나면 내 몸의 회복이나 당장 눈앞에 육아도 문제지만 복직 전까지 대리양육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나 대신 아이를 돌봐 줄 사람, 대리양육자가 없으면 복직 자체가 불투명해진다. 사람 구한다고 끝이 아니다. 대리양육자와 나의 케미랄까, 궁합에 따라 생활의 질이 수직상승할 수도 있고 전쟁의 서막이 될 수도 있다. 


대리양육의 방식은 크게 보자면 세 타입인데 1) 시어머니나 친정엄마, 그러니까 조부모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고, 2) 어린이집 종일반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3)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응용편으로 위 세 타입을 적절히 섞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오전엔 조부모님이 봐주시다가 오후엔 어린이집에 보낸다던가.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부모만큼이나 아이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점에서 조부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은 대체로 행운으로 여겨진다. 조부모 육아는 우선 조부모의 건강이 허락해야 하고, 도와주겠다는 동의가 있어야 하며, 사는 곳이 가까워야 하기 때문에 애초에 가능한 옵션에서 제외되는 집도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도 시어머니는 결혼 전에 돌아가셨고, 친정엄마는 경상도에 사셨기 때문에 고려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었다. 


적당한 시점에 베이비시터를 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밖에 친정엄마가 먼저 제안을 해왔다. 나를 위해 무려 경상도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와 아이를 봐주겠다는 거였다. 엄마가 운영하던 녹즙대리점도 팔아 버리겠다 했다.(그렇게까지??) 오랜 기간 해오던 장사도 접고, 생전 살아본 적 없는 서울로 오겠다고 무리수를 둔 건 혹여나 내가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 지쳐 회사를 관둘까 봐 겁이 나서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딸의 간판을 엄마의 자랑으로 삼고 살았는데. 너도 나처럼 집에 들어앉으면 그 길로 끝이란 소리를 여러 차례 했다. 


"집에서 애 키우다가 다시 대기업에 들어가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너는 그만 둘 생각 말고 회사만 다녀. 너랑 나랑 둘 중에 은퇴를 한다면 내가 해야 안되긋나. 엄마가 많이 생각하고 결정했어." 


회사를 관두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엄마는 지레 내가 일을 포기할까 봐 노심초사했고, 엄마와 나 모두 일을 해도 될 텐데 둘 중 하나는 은퇴를 해야 굴러간다는 결론을 냈다. 그런 결심을 하기 전에 당사자인 나랑 상의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본인의 결정이 딸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란 데 의심이 없었고 거의 선언에 가깝게 통보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고마운 한편으로 난감했다. 당시 우리 집은 20평대 아파트였는데 인근에 다른 집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내 집에 들어와 사는 일이 여간 복닥거리는 일이 아닐 것이었다. 좁은 공간이 문제라기보다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생활방식의 충돌, 그리고 독립한 지 10년이 넘어 어느새 사고방식의 차이도 클 텐데 사사건건 조율해가며 살아야 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시어머니든 내 어머니든 나는 되도록이면 내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스스로 해결하고 살고 싶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소년기 내내 나의 목표는 독립이었다. 지독히도 바라왔던 독립을 이제야 완전히 이루었는데 다시 엄마와 살림을 합치다니. 나에겐 내 새끼를 돌보는 문제에 앞서 나 스스로를 돌보는 문제, 겨우 이뤄낸 나의 독립이 뒷걸음질 치는 일이기도 했다. 


또 엄마가 장사까지 접고 나의 복직을 서포트하겠다니 엄마의 경력단절이 무색해지지 않게, 엄마 몫까지 떠안고 가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내가 엄청난 전문직도 아니고 그저 월급쟁이가 애 낳고 복직하는 것뿐인데 2대에 걸쳐 이렇게 비장할 일인가. 엄마랑 다시 찌지고 볶고 살 일이 엄두가 안 났지만 엄마는 이미 결심을 했고, 나 역시 다른 뾰족한 수도 없었다. 결국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게 됐다. 평일엔 녹즙대리점을 운영하고, 주말엔 은퇴한 친구들과 지방 소도시의 각종 축제 투어를 하던 엄마는 부지불식간에 수도권 위성도시에 와서 생애 최초로 아파트 생활이란 걸 하게 됐다.


앞서 이러저러한 우려를 한 게 민망하게도 나는 엄마와 합가를 하자마자 친정엄마 프리미엄을 야무지게, 아주 살뜰히 누렸다. 갈등이고 자시고 엄마에겐 나도 보살펴야 할 새끼였으니까. 내가 새끼를 위해 이유식 재료를 팔목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다지고, 똥을 치우고, 재우고 씻겼던 것을 엄마는 나를 위해 했다. 나와 사위, 새끼의 새끼까지. 2+1으로 묶인 셋을 먹이고, 어지러운 집을 치웠다. 돌봄노동 카테고리가 넓었지만 살림 구력은 나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엄마가 오고 나서 아이는 살찌고 집은 구석구석 윤이 났다. 덕분에 복직 초기에 집은 엄마에게 맡기고 회사 적응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베이비시터를 고용했다면 약속한 퇴근시간에서 한 시간만 늦어도 세상 죄인이 됐을 텐데, 엄마는 내가 혹여나 아이를 낳은 후 회사에서 뒤처지거나 눈치를 보게 될까 봐 야근도 회식도 무조건 등을 떠밀었다. (어찌나 의욕적이었는지 회식 강요는 직장상사보다 엄마가 더 많이 했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고! 니는 회사일 해야지. 집은 내한테 맽기고 회식이고 뭐고 애 핑계로 빠지면 안 된다."  


엄마는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정확히 몰랐으면서 집에 들어앉기보다는 뭘 하든 간에 큰 건물에 사원증을 찍고 들어 가서 했으면 했다. 대충 인사업무를 한다고 설명을 하면, "사람 뽑는 기 회사에서 젤 높은 자리 아이가!" 하면서 좋아했다.(아닌데.) 혼자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던 육아휴직 기간엔 후줄근한 옷을 입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는데. 엄마가 도와주니 얼굴에 뭘 찍어 바르고 나갈 여유도 생기고 때때로 아이를 낳기 전과 다름없는 자유도 느꼈다. 삼한사온처럼 어떤 날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어떤 날은 일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의 희생 덕분에 생활이 편해진 만큼 대가도 치러야 했다. 미루고 미루던 임플란트를 해야겠다는 엄마. 딱히 보내달라고 하지는 않지만, 세계 테마 기행을 보며 친구들은 모두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는데 모임에서 베트남 못 가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네 번 하는 엄마. 베트남에 다녀오면 다음 해엔 오키나와에 혼자 못 가본 신세가 되는 엄마. 손녀 따라 놀이터에 쫓아다니자니 외투가 무거워서 피곤하다는 엄마. '내 마음을 맞춰봐' 화법을 구사하는 엄마를 위해 가벼운 패딩을 사드리고, 베트남행 티켓을 끊고, 임플란트를 해드리고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도 내 몫이 되었다.   


엄마는 딸이 대기업을 다니는 것만으로 뭔가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엄마에게 베이비시터 월급을 드리고, 늘어난 식구만큼 늘어난 생활비를 부담하다 보면 돈이 안 벌리는데 왜 일하는 건지, 내 인생에 손익분기점이 오긴 오는 건지. 회사에서 눈치 보고 돌아와 나를 위해 은퇴를 택한 친정엄마 눈치 보고. 경력을 쌓는 게 아니라 우여곡절을 쌓는 것은 아닌지. 아 아 아 모르겠다! 내 머릿속은 아모르파티가 됐다. 처음에 아이를 봐주러 올 때보다 엄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늙어 가는 게 싫으면서도 가장 큰 수혜자는 나라는 것에 죄책감도 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엄마와 결별해야 될 때가 왔다. 혼자 지내던 아빠가 대장암 2기 판정을 받으셨다. 평생 병원 근처도 안 가본 양반이 건강검진에서 갑작스레 암 선고를 받으신 거다. 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면 부모님의 건강문제로 갑작스레 멘붕에 빠지는 일이 있다는 걸 종종 들어왔다. 하지만 함께 사는 엄마의 건강만 살폈지, 그게 아빠로부터 비롯될 줄은 몰랐다. 아빠는 긴급수술을 했고, 엄마는 며칠 사이에 부랴부랴 아빠의 간병인으로 포지션을 바꿨다. 


엄마와 얼레벌레 헤어지고 하루아침에 어린이집에 직접 등 하원을 시키는 육아 독립군이 되었다. 준비 없이 맞은 생활이라 다시 복직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생활에 구멍이 많이 생길 줄 알았는데 몸은 고단했지만 오히려 감정적으로 편해졌다. 또, 무조건 자기편이 되는 할머니 그늘 아래 아이는 응석받이가 되고 남편도 장모님이 살림을 도맡아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엄마와의 결별을 계기로 비로소 우리 셋, 남편과 나와 아이만의 룰이 만들어졌다. 내 아이를, 내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 집이 엉망이어도 온 가족이 함께 적응해 나가는 일이 속 편했다. 내 인생과 내 생활에 의기양양해졌달까. 


엄마와 헤어지고 돌이켜보니, 아무도 강요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는데 지나치게 나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에게 원망과 죄책감이 뒤범벅이 된 상태였다. 엄마는 나를 위해 자청해서 도와준다고 했지만 내가 회사생활을 지속하는 게 엄마의 바람을 충족하는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감, 혹여라도 내가 회사를 관두면 엄마의 노력을 망치는 것 같은 죄책감, 다 커버린 내가 엄마와 상호의존의 관계로 얽혀버린 답답함.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았던 기간은 죄책감이 느껴지면서도 엄마의 단물을 빨아먹었던, 원하고 원망하던 시간이었다. 뒤늦게 엄마 탓을 하는 것 같은 가책이 들기도 하지만. 친정엄마에게 육아 도움을 받는 딸의 마음은 이렇게나 복잡 미묘하다는 것을 대나무 숲에 외치는 마음으로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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