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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미 Oct 16. 2021

06. 집안일에도 성과평가가 있다면

남편은 다정하고 유능한 사람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고 결혼했다. 결혼 전 나는 남편과 같은 건설회사의 인사팀 대리였고 남편은 현장 엔지니어였다. 사내연애를 하던 시절, 인사팀이라는 위치를 사적으로 활용해서 남편의 인사카드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제법 영리하게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처럼 인사팀이거나 사내커플이 아니어도 아마 연애할 때 각자의 기준으로 상대방에 대한 인사평가를 마친 후 결혼을 할 것이다. 성실도라던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던가, 책임감이라던가...


그러나 결혼을 하고 깨달았다. 사람의 역량은 여러 분야로 나뉘어 있고 사회적으로 일을 하는 역량과 생활형 역량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회사 업무는 곧 잘했던 것 같은데, 말귀가 어두운 사람 같지도 않았는데 집안일이나 육아에 임할 때는 백치미가 넘쳤고 무엇보다 수동적이었다. 특히 눈에 문제가 많았는데 내 눈에 보이는 일거리가 남편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가령 설거지를 할 때 내가 생각하는 설거지의 범위와 남편이 생각하는 범위가 달랐다.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해본다. 설거지란 무엇인가.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 


먼저 

1) 식사를 마친 상을 치우고, 

2)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고 

3) 온수에 헹구고 

4) 건조대에 정리를 한다. 

5) 설거지를 하느라 어수선해진 싱크대를 정리하고 

6) 주위에 튄 물을 닦고 

7) 가스레인지나 인덕션 등등의 화구를 닦고 

8) 주변 물기를 닦은 행주를 빨아 넌다. 


위 8단계까지 거쳐야 설거지 한 세트가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앞 뒤로 두 세 단계를 생략하고 세제를 묻혀서 닦고 헹구는 것만이 설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함께 밥을 먹은 또 한 명의 성인 노동자(=나)는 설거지를 하기 좋게 식사 후의 식탁을 정리해줘야 하고, 설거지 하기 좋게 밥풀 묻은 그릇을 물에 불려줘야 하며, 설거지를 다 한 후에 싱크대 주변을 또 정리해야 한다.  


어느 날 남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설거지를 마친 후에 주변에 물은 왜 안 닦는 건지? 설거지 당번이 일을 하고 부엌이 어수선하다면 그것은 누구 몫인지? (묻다 보니 급발진.) 집안일도 회사처럼 성과평가를 받는다면 매번 동료가 앞뒤로 뒤치다 거리를 하게 할 것인지? 회사에서 혹시 너 일하기 좋으라고 동료가 엑셀 파일을 켜주면 그때 책상에 앉는 것인지? 당신이 오너도 아니고 주주도 아닌 회사에선 인정받으려 최선을 다하면서, 당신이 주인인 집에선 왜 주인의식 없이 일을 하는 것인지. 


나의 지적에 남편은 발끈했다. 듣기 좋게 가르쳐주면 알아들을 일을 꼭 그렇게 공격하듯이 이야기해야 하느냐며 되려 짜증을 냈다. 말의 내용보다는 내 태도를 문제 삼았다. 아니 이 사람아. 회사에선 누가 상냥하게 가르쳐줘서 일을 하나? 회사 일을 할 때는 능력 그 이상을 발휘하려 애쓰고, 인정 욕구가 넘치고, 잘 안 풀리는 일도 해결하려 노력하고, 팀 성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 가정에서는 종종 백치 인척 한다. 성인에게 누군가 차근차근 친절히 가르쳐 줄 때는 그에 합당한 돈을 냈을 때뿐이다. 설거지를 요리조리 하라고 좋은 태도로 가르쳐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 아내에게 그런 서비스 정신까지 요구하다니. 결국엔 니가 뭔데! 상전이야 뭐야 까지 나온다. 


설거지를 예로 들었지만 육아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이 매 한 가지이다. 아이에게 무슨 내복을 입힐지, 무엇을 먹일지, 울면 어떻게 할지 앞뒤 맥락을 살피지 않고 매사 나한테 허락과 확인, 도움을 받으려 할 때마다 단전이 뜨거워지고 명치가 답답했다. “이거 입힐까?” “이거 먹일까?” "왜 울지?"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이 말이야. 선생님, 제 아이를 귀하께서 돌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귀하의 자녀이기도 합니다만.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내게 묻는 것은 결국 우리가 육아나 가사노동의 공동책임자가 아니라, 이 업무의 책임자는 나(=아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모두가 아는 바, 집안일이란 것은 하려고 들면 끝이 없고, 매일 반복적이라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지만 뭘 가르치고 자시고 할 만큼 난이도가 높은 일은 없다. 어려운 공식을 외워야 하는 것도 아니요, 학위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손에 꼽히는 4년제 대학을 나오고, 입사시험도 통과하고, 사회생활도 하는 남편이 집안일 분쟁이 날 때마다 백치인 척하는 것이 얄미웠다. 실제로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것에 매번 약이 올랐다. 모르는 게 죄냐고? (죄지! 중죄여. 나랑 같이 새끼 뒤치다거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 뒤치다거리까지 바라다니. 이 놈을 매우 쳐라.)


공고한 유교사회인 우리나라는 가정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내 놓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면서도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은연중에 그 집 여자는 뭘 하고 있었느냐며 힐난의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여자도 집안이 어수선하거나 자녀 문제로 구설에 오르면 아내가, 엄마가 먼저 손가락질을 받는다. 

나 역시 아이가 어릴 때, 외출을 할 때마다 사회가 내게만 양육 책임을 부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운 날씨에 아이 옷을 조금 얇게 입히거나, 더운 날 조금 과하게 입히면 여지없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이웃주민이 나를 붙잡고 애 옷을 왜 이렇게 입혔냐고 은은한 시집살이를 시킨다. 주민 1만 말을 걸면 다행인데, 그런 날은 보통 주민 2, 주민 3 연결되어 보는 사람마다 “아이고 애기 너무 추워서 어떻게 해”, “양말을 신겨야지” 마치 혼잣말 같은 훈계를 한다. 이웃집 아이의 안전과 건강을 염려해서겠지만 아이의 보호자 두 명이 서 있는데 아이를 보살피는 문제에 있어선 언제나 내가 시선을 받게 된다. 사회적 시선이 이러하니 남편도 집안일과 육아에 책임자는 나요, 자신은 보조로서의 역할만 잘 수행해도 평균 이상의 좋은 남편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다시 집안으로 돌아와서. 집안일을 할 때,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조금 더 책임을 부여받는 쪽이 더 깊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찬통을 제대로 닫고, 다음 상차림을 수월케 하기 위해 냉장고에 정리해서 넣고, 식탁을 말끔히 훔치고, 설거지가 끝난 후의 어수선한 싱크대를 정리하지 않아도. 고무장갑을 손에 끼는 액션, 그 자체로 “아이고 그 집 남편이 많이 도와주네, 훌륭하네” 이런 찬사를 받는 입장에 있으면 설거지 앞뒤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생각하기 어렵겠지. (성인이 자기가 먹은 것을 스스로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걸 우쭈쭈 해줘야 한다니.) 


설거지 단계를 스킵하는 것쯤은 눈 감고 넘어가고, 남편이 말한 대로 상냥한 태도로 에둘러 말했다면 우리는 싸움의 횟수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라를 되찾는 마음으로 싸웠다.(머리도 거의 의병 스타일로 풀어헤치고)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싸운 결과, 나는 설거지의 절차와 범위에 대한 쌍방의 합의를 봤고 우리 가정의 표준 설거지 체계를 만들었다. 후유. 아니 이걸 이렇게까지 싸워서 쟁취할 일인가 싶고, 돈 백만 원 써서 식기세척기로 해결하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이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와 수십 년을 살아야 한다. 직접 설거지를 해보지 않고는 식기세척기 할애비가 와도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십 년을 싸워서 향후 수십 년이 편하다면 자,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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