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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미 Sep 22. 2021

03. 불임과 허니문 베이비

  얄궂은 소리만 하는 의사는 갈수록 재밌는 양반이었다. 다음 진료에서 남자 친구가 있느냐, 그 남자랑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등등 절친 사이에나 할 법한 질문으로 연달아 실례를 하더니 결혼을 서둘러 보라고 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해서 임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해도 남들처럼 아이를 바로 가지기 어려울뿐더러 어린 나이도 아니니 오늘부터 당장 피임부터 끊으라며(ㅋㅋㅋㅋ) 의료적인 소견 외에도 적극적으로 내 인생을 설계해 줬다.  



이런 사정은 알리지 않은 채 당시 남자 친구(현 남편)에게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 후에 아이 없이 사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이런 질문을 던지면 보통 "우리 둘이 잘 살면 되지." 이런 이야기를 하던데. 구 남친은 이렇게까지 단호할 필요가 있나 싶게 단호했다. 자기가 꿈꾸는 결혼에 아이가 없는 생활은 없다며, 아이는 꼭 낳고 싶단다. 아쉽게도 나는 이 자의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난임, 불임이란 것은 가능성이 높단 것이지 확진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나조차도 반신반의했지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나랑 결혼하면 아이를 못 낳을 수도 있다고. 물론 단언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산부인과 전문의라는 사람에게 난임, 불임 같은 이야기를 듣고 왔으니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고. 자 이제 "너만 건강하면 돼….. 둘이서 행보카게…." 이런 멘트로 이어질 차례가 되었는데. 구 남친은 두 번째 기회에도 드라마 대사는커녕 아이 없는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고 했다. 진정한 승부사는 역배에 거는 법인데!



며칠을 고민하던 구 남친은 결심이 선 듯 비장하게 결혼을 서둘러 보자고 했다. 일찍 결혼한다고 일찍 아이가 들어설지는 알 수 없지만 함께 치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서둘러 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로부터 6개월 정도 결혼 준비 기간을 가진 후 전격 결혼했다.


사내커플이었기 때문에 결혼 후에도 같은 직장을 다니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 생길 것 같아 결혼 결심과 동시에 이직도 준비하게 되었다. 산부인과 진료에서 출발해서 결혼과 임신을 결심하고 이직까지. 생활에 변화가 휘몰아쳤다. 


이직을 준비하며 면접을   면접관이 결혼 계획이 있느냐 물었다. 비혼도 많고 이혼도 많고 아무튼 자기 쪼대로 사는 세상. 채용면접에서 점점 개인적인 질문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내가 취업을  때만 해도 여성의 결혼과 임신으로 인해 기껏 채용한 인력이 공석이 되지는 않을지 확인하곤 했다. (남성들에게는 그런 질문 자체가 없다는 것이  씁쓸한 ) 사생활을 묻는 질문에 나는 초면의 면접관이 '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답변해드렸다. 자궁  종양부터 그래서 서두르게  결혼까지. 입사하자마자 결혼은 하게 되겠지만 임신은 신의 영역이라는 답변으로.  이야기가 심금을 울렸는지, 초면에 난임 이야기까지 꺼내는 구직자가 절박해 보였는지. 나는 단기간에 이직에 성공했다.



내 인생 최대의 미스터리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결국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길고 긴 설명을 하게 된 셈인데. 향후 직속 상사가 될 면접관에게 초면에 자궁이 어떻고 난임이 어떻고 해버렸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산부인과에서 교수라는 양반이 그렇게 진단을 내린 건데. 인체의 신비인지, 이직한 직장이 터가 좋았는지 결혼하자마자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다. 한두 달 생리를 안 한다 싶었는데 임신이라니. (가임기 여성들아. 두어 달 생리를 안 하면 생리불순이 아니라 임신이 아닌지 의심해 봅시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떠서 나도 놀랬지만 내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남편도 놀랬다. 자꾸 임신 테스트기 성능을 의심했다. 제대로 되는 거 맞는 거냐며. 임신 맞아? 확실해? 몇 번이나 되물었다. (드라마 속 남편들은 아내의 임신 소식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하던데. 역시 드라마처럼 흘러가지 않아.)


이렇게 쉽게 임신이 될 거라면 그 난리를 왜 친 건지, 왜 결혼을 휘모리장단처럼 서둘렀으며 온 동네에 난임이란 소문은 왜 낸건지. 나도 남편도 머쓱했다. 직장 상사는 한창 일 할 대리가 입사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이제 일 좀 시키려나 했더니 임신 소식까지 알려서 입은 웃지만 눈은 결코 웃지 않는 표정으로 ‘뭐 어떡해, 축하해야지.’ 세상 떨떠름한 축하를 했다. (여러분 세상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디다. 내 자궁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부랴부랴 진료를 받으러 가서 담당 의사에게 아니 난임이라고 하셔서 결혼까지 서둘렀는데, 허니문 베이비가 생겨 버렸다고. 이렇게 쉽게 들어설 줄 알았으면 계획임신을 했지, 승진 밀리면 어떡하냐고 따지듯이 말을 했더니. 오히려 기막혀 하며 "내 덕에 행운이 온 줄 알아야지! 이런 일이 흔한 줄 아느냐" 라며 큰소리쳤다. 나에게 정말 드문 행운이 온 건지 어쩐 건지 알 수 없지만 믿어야지 뭐 어떡해. 내 인생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난임이라더니 허니문 베이비가 웬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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